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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종근당 창업자 탄생 100주년, 약업보국 스토리
이종근 종근당 창업자 탄생 100주년, 약업보국 스토리
  • 조혜승 기자
  • 승인 2019.02.08 2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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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명예 걸고 한국 대표 제약사 일궈...미래 보는 안목 탁월했던 경영자

 

고촌 이종근 회장.<종근당>

[인사이트코리아=조혜승 기자] “우리는 약을 만드는데 그쳐선 안 된다. 우리가 만든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항상 우리의 약이 있게 하는 사명을 지녀야 한다.”(고촌 이종근 회장 어록 중)

종근당은 창업주 고촌 이종근 회장의 26주기 추도식을 지난 7일 서울 충정로 종근당 본사에서 열었다고 8일 밝혔다.

특히 올해 추도식은 이종근 회장의 탄생 100주년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종근당의 감회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종근 회장은 평생 약업보국 정신을 실천하고 제약산업의 현대화를 이끌며 종근당을 한국 대표 제약사로 일군 장본인이다. 업계에서는 올해 종근당이 1조 매출 고지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다. 

약업보국(藥業輔國) 일념으로 종근당 세우다

1919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이종근 회장은 고사리, 칡뿌리를 뜯어 팔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부친 이택기(李宅基) 공(公)과 모친 신택순(申宅順) 여사와의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일합방의 망국적인 슬픔과 빈곤을 몸소 체험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이 회장은 13세에 서울로 올라와 서대문구 송월동 토막촌에 정착했다. 이어 1934년 화광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 생계를 잇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철공소 견습을 시작으로 쌀 배달에 이르기까지 가족 생계와 자신의 땀의 대가를 배워 가며 수많은 일을 전전했다. 

그는 1935년 철공소 견습공과 스즈키 전기상회 사동, 1936년 경성정미소 쌀배달부를 거쳐 1939년 약품외판원을 하며 마침내 약과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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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철학>

-인류 건강 수호로 복지사회 구현

-생명의 존엄성 바탕 우수 의약품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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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1941년 불과 23세에 4평 규모의 종근당 모태 ‘궁본약방’을 설립했으며, 1943년 마포 및 서대문 지역 약방경영인들과 서부 약우회를 결성하는 등 약업인으로 뜻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48년 가짜 활명수 사건이 터지면서 타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가 의약품 판매가 아닌 약품 제조를 하기로 마음 먹게 된 계기가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한 이 회장은 "우리 국민 건강은 내 손으로 직접 지켜야 한다"는 꿈을 품었다.  부산 피난시절 재기의 기틀을 마련하는 가공장을 짓고 ‘염산에페드린정’ ‘산토닌정’ 등 약품을 생산, 공급하며 사업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195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종근당제약사’로 회사명을 개명하고 해외 유수의 제약사에 눈을 돌려 한국 제약산업의 국제화를 추구했다. 같은 해 국내 최초로 아시아 최대 규모인 항생제 원료합성 공장을 준공했다. 1961년에는 97일간 세계 16개국 제약사를 직접 방문하는 강행군을 펼친 끝에 항생제 원료를 자체 생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와 함께 1972년 국내 제약사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 기반을 닦은데 이어 1974년 발효공장을 완성했다. 

그는 1970년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너무 비싼 약값 때문에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1980년 자체 기술로 세계에서 4번째로 항결핵제를 개발, 치료 혜택을 제공하고, 향후 신약개발의 기반이 된 중앙연구소를 제약업계 최초로 설립한 일 등은 질병 없는 사회를 꿈꾼 참 제약인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회장은 창업 이래 국민보건 향상을 위해 보다 우수한 의약품을 생산하고 국민 건강을 우리 힘으로 지키겠다는 사회적 책임을 꾸준히 실천해왔다.

인화단결·근면성·창의개발 경영철학 강조 

이 회장은 생전에 직원들에게 ‘인화단결’을 강조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바늘구멍에 실을 꿰듯 회사발전이라는 큰 문을 통과하기 위해 뭉쳐야 한다. '뭉치면 산다'는 말은 한낱 표어에 불과한 말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해 항상 새롭고 보편적인 진리”라고 말해 왔다. 그는 직원 개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구성원 모두가 자기 일에 주인의식을 갖고 자율적으로 창의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시절 이미 기업은 사람에 의해 창조되고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스스로 땀 흘려 일했던 이 회장은 ’근면성실‘을 또 하나의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종근당이 어려운 고비에 처할 때 마다 일심동체가 되어 극복할 수 있었던 원천도 바로 근면과 성실이 도움이 됐다고 그는 밝힌 바 있다.  아울러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개척하는 ’창의개발‘을 종근당의 정신으로 자리 잡게 했다. 조직 구성원들의 창의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새로운 특허 기술을 창조하는 것을 장려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 사명을 ‘종근당’이라 정하고 제약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거창한 사명을 내세워 출발 당시부터 크게 보이려고 했을 때 그는 ‘종근당’을 고집했다.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종근당’이라는 기업의 성공을 위해 부단히 도전하고 응전해 왔다.

그는 자신이 비록 대단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인격과 모든 생활을 제약업에 바치기로 한 만큼 자신의 이름을 감출 이유가 없으므로 이름을 내 건 것이라고 했다. 일본, 유럽 등 외국에서는 기업 상호에 창업자 이름을 붙이는 것이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사례에 속한다. 그만큼 그의 강한 기업가 정신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일상적인 인간관계는 물론 상거래에서도 인간적인 신뢰가 바탕이 되는 신용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으며 심지어 거래시 돈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도 두 번 오게 하지 않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 최초 결핵·폐렴 항생제 미 FDA 승인 획득

항생제를 자체 개발해 국내 최초로 미 FDA 승인을 받은 일은 그의 제약 인생 중 독보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1960년대 대한민국 국민병은 결핵이었다. 결핵은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 영양 상태와 주거 환경이 나쁜 빈민, 햇볕을 자주 쬐지 못하는 청소년이 주로 걸리는 질병이다.

광복 후 교통수단 발달과 도시화로 인한 인구 밀집과 공기 오염 등으로 결핵균이 더 빨리 퍼졌다.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전국에서 결핵 중환자만 50만명으로 결핵으로 하루 평균 300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됐지만 병상은 약 3000개에 불과했다. 당시 한 신문은 대한민국을 “폐결핵에 무관심한 왕국”이라고 쓰면서 “한 해 읍 하나가 망해도 먼 산 불 보듯 한다”고 정부 당국의 무관심과 무대책을 비판할 정도로 의약품 공급이 열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회장은 항생제 원료 개발에 힘써 결핵과 폐렴을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국내 최초로 미 FDA 승인을 받았는데 1968년 당시 미 FDA 승인을 받은 제약회사는 미국 외 100여개 회사에 불과했다. 특히 FDA 승인에 대한 도전이 무모하다고 여겨지던 시절 그의 도전과 성공은 제약업계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준 계기가 됐고 ‘하면 된다’란 의식을 업계 전반에 심어주었다. 

종근당은 항생제를 해외에 수출해 900만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국내 전 산업계를 통틀어 매출 규모에서 78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남다른 교육 열정...종근당을 '제약사관학교' 만들어

이 회장은 6.25전쟁 직후 부산에서 가공장을 운영하던 시절 빠듯한 회사 경영에도 직원들을 야간학교에 다니도록 할 만큼 직원 교육에 남다른 열정과 사명감이 있었다. 그는 1964년 사원 직계 자녀들의 등록금, 입학금 등 사내 장학금 지급을 추진한 데 이어 1973년 사재를 털어 종근당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공부해야만 좋은 약을 만들 수 있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한 그는 늘 공부하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모범을 보였다. 직원들이 인격체이자 직업인으로서 소양을 키우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종근당 장학재단은 1995년 재단법인 고촌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재단은 장학금, 무상 기숙사 지원 학술 연구, 교육 복지, 해외 장학사업 등 다양한 장학사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까지 45년간 7747명에게 415억원을 지원했다.

이 회장이 사재로 설립한 재단은 장학금 지원 외에도 지방 출신 대학생에게 ‘종근당고촌학사’를 제공하고 있다. 종근당고촌학사는 전월세난으로 주거 문제를 겪는 지방 출신 대학생들을 위해 민간 장학재단 최초로 마련한 무상 주거지원시설로 현재 서울 마포구 동교동, 동대문구 휘경동, 광진구 중곡동 등 3개관을 운영 중이다.

그동안 종근당에서 일하고 배운 제약인들이 다수 제약회사의 경영자로, 임원으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종근 회장의 교육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종근당을 인재양성의 산실로 만들었고 종근당을 통해 배출된 제약인재들은 국민 건강을 위한 중추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이 회장은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장, 은탑산업훈장, 한국의 경영자상, 2000만불 수출탑, 국민훈장 목련장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조폐공사가 발행한 고촌상 메달에는 고촌 형상이 담겨 있다.<종근당>

2006년 결핵퇴치에 앞장 선 이 회장의 업적을 기려 UN산하 결핵퇴치 국제협력사업단과 공동으로 국제적인 고촌상이 제정됐다. 2010년 한국조폐공사는 한국 제약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의 52번째 인물로 고촌 이종근 회장을 선정하고 기념메달을 발행했다.

미래를 보는 혜안 가진 고촌

이종근 회장은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이 탁월한 기업인이었다. 그는 화학기술과 전문적인 기술 인력이 낙후되어 있고 경제성과 효용성 때문에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원료 합성공장을 지었다. 또 순수 우리 기술로 의약품을 자체 생산해 국산화의 길을 열고 나아가 한국 제약기업으로는 최초로 일본 등 수출 길을 열었다. 선진기술이 필요한 제약산업의 세계 진출은 그때까지 기술 부족으로 부진했던 국내 다른 산업에도 큰 자극제가 됐다. 그 결과 첨단 기술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자신감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회장은 평소 근검절약과 솔선수범의 생활철학을 실천한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처럼 책상만 두들기며 부하직원에게 호령만 해서는 능률이 오를 리 없다”며 “윗사람은 항상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은 무인도에서나 살기 알맞다”며 “격언에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 말이 있는데 이상만 내세우는 사람은 사라진 무지개를 찾아 헤매는 사람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현실적 감각과 냉철한 이성을 가진 제약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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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촌 이종근 회장이 걸어온 길

-1919년 충남 당진군 고대면 성산리 출생

-1931년 가족 모두 서울 서대문구 송월동 상경

-1934년 화광보통학교 졸업

-1941년 종근당 모태 ‘궁본약방’ 설립

-195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종근당제약사’로 사명 변경, 국내 최초 항생제 연료합성공장 준공

-1968년 항생제 ‘클로람페니콜’ 국내 최초 미국 FDA 승인 획득

-1973년 장학사업 종근당고촌재단 설립

-1979년 종근당 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선임

-1980년 한국롱프랑 합작사 설립

-1983년 한국로슈 합작사 설립

-1983년 고촌학원 설립

-1986년 장학사업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상 수상

-1993년 고촌 이종근 회장 타계

-2005년 결핵퇴치 앞장 선 공로로 고촌상 제정

-2010년 한국조폐공사가 발행한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 52번째 인물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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