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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9:1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신랑 아버지가 주례라니, ‘장난판’이 됐구나
신랑 아버지가 주례라니, ‘장난판’이 됐구나
  • 이만훈 기자
  • 승인 2018.10.04 14: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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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례와 신식결혼식으로 돌아보는 인륜지대사 결혼

#. ‘가을 하늘 공활(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一片丹心)일세.’

애국가의 가사마냥 참 하늘이 높고 푸른 게 시원하니 좋다. 텅 비어 매우 넓다는 뜻인 ‘공활’이란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선선한 기운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저 넓은 하늘이 쪽빛으로 쨍할 테다.

흔히 가을을 일러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한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맑고 풍요로운 가을 날씨를 비유한 뜻이 무엔 지 그럴싸하다.

‘주렁주렁 너울너울 무르익고요/ 밤이 깊으면 소근소근 저마다 별이 소곤소곤/ 앞집 처녀와 뒷집 총각 냇가에서 소근소근’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면 오곡뿐만 아니라 냇가에서 소곤소곤 하던 처녀 총각도 결실(結實)을 한다. 자고로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이 ‘큰 일’을 좋은 철에 치르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모든 게 풍성하니 인심도 넘치고 그만큼 쏟아지는 축복도 넉넉하리니! 바야흐로 결혼의 계절이다.

결혼 첫 단계는 조상님들께 고(告)하는 것

#. 철이 철이니만치 하루가 멀다 하고 결혼 청첩(請牒)이 날아든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보니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이들의 경사(慶事)인지라 기쁜 마음으로 열어보곤 한다. ‘첩(牒)’자는 ‘반으로 잘라놓은 나무’의 상형과 ‘나뭇잎’의 상형이 어우러진 글자로 문서나 편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청첩(請牒)’은 결혼 따위의 좋은 일에 남을 초청하는 글발이요, 청첩장은 그런 내용이 적힌 종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결혼식에는 청첩이라는 것이 없었다. 맨 먼저 사당(祠堂)에 가 조상님들한테 “제가 누구와 혼인합니다” 하고 고(告)하는 것이 결혼의 첫 단계였으니까.

청첩은 신식 결혼식, 즉 지금과 같은 기독교식 결혼식이 늘어나면서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결혼청첩은 1920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실린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 변호사 김우영(金雨英)의 공개 청첩이었다.

‘敬啓者 生等은 牧師 金弼秀氏의 指導를 隨하여四月十日(土) 下午三時에 貞洞禮拜堂에서 結婚式을 擧行하옵나이다. 伊日에 尊駕 枉臨의 光榮주심을 伏望. 庚申四月三日 金雨英 羅蕙錫’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저희는 김필수 목사의 지도를 받아 4월 10일(토) 오후 3시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 귀하신 분께서 부디 오셔서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경신년 4월 3일 김우영 나혜석’

이 청첩은 “천벌을 받아 죽을 놈” “미친년이 따로 있었구나” 등등 장안 일대에 큰 화제 거리가 됐다. 신식 결혼이 생긴 뒤에도 신랑 신부가 비록 식장에서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는 가하면 함께 걸어 나가기까지 했지만 사회분위기는 여전히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터라 ‘내가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에서 누구와 혼인합니다’하고 미리 알리는 청첩장을 전달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신랑 김우영은 34세의 변호사로 딸까지 둔 가장이었고, 신부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로 당시 나이는 24세였다. 재기발랄한 처녀 화가와 변호사인 기혼 남자가 신랑·신부로 만나 결혼식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나섰으니….

더구나 김우영에게는 노모가 있었음에도 ‘전실 자식과 시어머니와는 따로 산다’는 서약을 하고 나혜석과 결혼을 한 것이어서 당시로선 ‘인간쓰레기’ 소리를 들어도 쌌다.

이들은 사이에 4남매를 두었지만 나혜석이 결혼 11년째 되던 해 파리 여행 중 그곳에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최린(崔麟·1878~1958)과 염문을 퍼뜨리자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그 직후 그녀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취미”라고 말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녀는 결국 40대를 넘기지 못하고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기독교 전파되면서 하얀색 웨딩드레스 등장

#. 우리나라에 서구식 혼인의례가 도입된 건 기독교의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은 1888년 3월 14일 수요일 저녁 서울 정동교회(한국개신교 첫 교회)에서 아펜젤러(H.G Appenzeller) 목사의 주례로 열렸다. 신랑은 국내 최초의 관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양반 자제를 입학시켜 통역관을 양성하는 동문학(同文學· 1883년 8월 1일 설립)의 학생 한용경이었고, 신부는 과부 박씨였다. 신랑 한용경은 전해 10월 세례를 받고 스크랜튼의 병원에서 통역하며 전도활동을 하고 있던 한국인 첫 전도사(권사)로 그 해 11월 부인을 잃었는데 친구들의 소개와 권유로 25세이던 과부 박씨를 알게 돼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의 결혼식에는 감리교 선교사 전원과 장로교 선교부에서 한 명이 참석했다. 아펜젤러 목사는 “이들이 사람들 앞에 나와 기독교식으로 부부가 되는 것은 더없이 용감한 일”이라고 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열린 피로연에는 케이크(떡)와 아이스크림이 차려졌고 차를 마시며 축하해주었다. 이들은 한글로 된 결혼예식서로 혼인하였고, 신부는 자기 재산도 많이 가져왔다고 한다.

한국 최초로 신부가 면사포를 쓴 것은 1892년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황씨와 배재학당 남학생의 혼인식에서였다. 당시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면사포를 착용했고, 신랑은 프록코트를 입고 예모를 썼다.

1910년대 혼례복을 보면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화관과 ‘쓰개치마 형’ 베일을 썼으며 신랑은 당시 모닝코트라 불렸던 턱시도 칼라의 연미복을 입고 칼라를 꺾어 내린 흰색 와이셔츠에 보타이 차림이었다. 1920년대에는 신여성의 등장으로 신부의 치마 길이가 짧아졌다. 흰색 저고리에 흰색 양말과 흰 구두를 신었으며 이마를 덮는 화관에 쓰개치마 형 베일을 썼다.

서양식 웨딩드레스가 등장한 것은 1930년대로 서양식 베일, 들러리와 화동도 이때 출현했다.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서구식 낭만적 혼인 개념이 유입됐으나 6.25전쟁과 분단, 이후의 빈곤과 극심한 사회혼란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 수면 아래 침잠하다가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 방불케 하는 전통혼례 풍경

#. 1960년대만 해도 시골에선 대부분 전통방식으로 장가들고 시집갔다. 그래서 혼사(婚事)가 있으면 정작 일을 치르는 집안뿐만 아니라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혼기가 찬 자녀가 있는 집에 알게 모르게 중신애비가 왔다 갔다 하면 이내 뉘 집과 뉘 집이 사돈을 맺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짜하기 마련이고, 얼마 안 있어 혼사 집에서 안식구가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며 잔치에 들어갈 술과 떡, 두부, 묵, 잡채, 부침개 등 손이 많이 타는 음식에 대한 ‘부주’를 부탁하고 다니면 반(半)공식화 되곤 했다. 얼마 뒤 함진아비를 앞장세우고 함이 들어오면 동네방네 소문이 마침내 기정사실로 되어 버린다. 혼일이 가까워지면 며칠 전부터 그 집에 먼 친척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일손을 도우려 동네 아낙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손님접대용 그릇을 마련하느라 마을공용 반상기(飯床器)는 물론 살림이 큰 집들 위주로 자배기며, 소래기며, 방구리며, 함지박이며, 큰 양푼, 작은 양푼에서부터 국그릇, 밥그릇에다 각종 접시며 종지, 보시기, 조치 등등 그릇나부랭이들이라면 다 그러모았고, 이 마을 저 마을 종친회, 친목계 등에 사정해 대형 천막들을 빌어다 마당 근처 평평한 곳에 둘러쳤다. 우물 근처엔 잔치국수를 말아내기 위한 임시 부뚜막이 들어서고 닷 말들이 대형 가마솥이 떡하니 걸려 ‘식사전쟁’을 기다렸다.

이윽고 혼인날이 되면 신부 집은 새벽부터 정신이 없다. 아니, 몇 날 며칠을 그랬건만 오늘은 더 그렇다. 마지막으로 각 준비물목을 일일이 꼽아가며 다시 챙겨보곤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초례청(醮禮廳)을 준비해야 한다. 초례청은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얼굴을 보고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절차인 초례를 치르는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결혼식장이나 마찬가지.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면 거기에 차리지만 대개는 안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진설한다. 병풍을 남북으로 친 가운데 좌석은 동서(東西)로 마련하고 교배상(交拜床)을 중앙에 놓는다. 상 위엔 한 쌍의 촛대, 소나무와 대나무가 꽂힌 꽃병 한 쌍, 백미 두 그릇, 암탉과 수탉을 남북으로 갈라 놓인다. 세숫대야에 물 두 그릇과 술상도 두 상 마련해놓아야 준비가 끝이다. 이제 신랑만 오면 된다.

신랑은 늘 오후에 왔다. 손님들이 국수점심을 하며 막걸리도 서너 잔씩 주고받을 즈음에 마을 어귀가 시끌시끌하면 신랑이 왔다는 신호다. 어떤 신랑은 택시로 신부 집 앞에까지 오지만 제법 산다는 집안 아들이면 동구 밖에 차에서 내린 뒤 미리 준비해둔 말을 타고 신부 집으로 오기도 했다. 물론 사모관대(紗帽冠帶) 단령(團領)차림에 목화(木靴)를 신어 한눈에도 신랑인줄 알 수 있었다. 홍색 보자기에 싸인 나무기러기(木雁)를 안은 ‘기럭아범(雁夫)’을 앞세우고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 쪽 친척 대표가 나와 세 번 읍(揖)을 하며 맞는다. 신부 집에는 바깥마당에서 대문을 지나 초례청이 차려진 안마당이며 대청마루, 안방, 건넌방 등 그야말로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에는 죄다 구경꾼들로 들어차 들어오는 신랑을 머리꼭대기서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나름대로 신부와 견주어가며 ‘겉궁합 풀이’를 해댄다.

“신수는 그만하면 훤한데 체수가 좀….” “체수는 약해도 속이 꽉 차 보이는 게 집안 건사는 잘 허겄구먼 그래.”

신랑은 신부집 문전에서 이미 기럭아범으로부터 나무기러기를 받아 기러기 머리가 왼쪽으로 가도록 안은 터다. 신랑도 따라서 세 번 읍한 뒤 그 신부친척을 오른쪽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면 대문간 봉당에 깔린 멍석을 지나는데 동네 총각들이 뿌려놓은 콩이며 붉은팥을 지르밟아야 하기 때문에 조심조심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지고야 만다. 붉은색으로 나쁜 기운을 물리치려는 바람과 신랑의 속 됨됨이가 차분한지 덤벙거리는 지 떠볼 양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풍속이라지만 동네 처녀를 빼앗기는 데 대한 모종의 복수심(?)이 반영된 장난도 절반은 섞였을 테다. 봉당 워킹(walking)을 무사히 통과해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던 신부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도 가벼운 읍으로 맞이한다. 신랑은 초례상 앞에 따로 마련된 전안상(奠雁床) 위에 나무기러기를 올려놓은 뒤 꾸부리고 일어서서 뒤로 약간 물러나서는 두 번 절(再拜)을 하니 신부 어머니가 나무기러기를 상 째 안아서 방에서 대기 중인 신부 앞에 갖다 놓는다. 이른바 전안례(奠鴈禮)이다.

전안례가 끝나고 신랑이 초례청의 동쪽자리로 들어서면 원삼(圓衫) 혹은 녹의홍상(綠衣紅裳·녹색저고리 붉은 치마)에 족두리를 쓰고, 연지곤지 찍은 모습으로 수모(手母·도우미)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신부가 등장(姆導婦出)하는데 거기엔 레드카펫 대신 하얀 광목(白布)이 깔리는 게 법이었다. 신랑이 신부를 초례청으로 안내하면 신부의 수모가 신랑 쪽 자리를 펴고, 신부 쪽 자리는 신랑의 도우미가 편다. 이어 신랑과 신부가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선다. 요즘처럼 연애를 한 것이 아니고 중매를 통한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사이라 처음으로 서로 대면하는 순간이다. 상견(相見)을 마치자 신랑과 신부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준비돼 있는 세숫대야에서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는다. 신부가 수모의 도움을 받으며 신랑한테 두 번 절을 하니 신랑이 한 번 답례하고, 다시 신부가 재배하자 이번에도 신랑은 한 번 절로 예를 표한다. 그 다음 신랑이 신부에게 읍하고 신랑과 신부는 각각 꿇어앉는다. 합근례(合巹禮)를 하기 위해서다. 대례를 진행하는 집사자(執事者=唱笏子)가 “합근분치서부지전(合巹分置壻婦之前: 표주박 같은 술잔을 신랑과 신부 앞에 놓으라)!”하고 외치니 도우미들이 술잔을 두 사람 앞에 갖다놓는다. 집사자가 또 다시 “시자침주(侍者斟酎)!”하니 신랑 왼쪽의 도우미가 잔을 들고 오른쪽 도우미가 술을 따른다. 신부 쪽도 마찬가지다. 신랑 신부가 술을 받아 시자에게 넘겨주니 땅에 세 번 나누어 붓는다(壻揖婦祭主). 땅에 대고 맹서하는 의식(誓地禮)이다. 이어 안주도 땅에 던진다. 진찬(進饌)이라는 건데 들밥을 먹을 때 고수레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술을 따르자 이번엔 신랑이 신부에게 읍을 한 뒤 술을 마신다. 신부는 도우미가 들이미는 잔을 입에 살짝 대기만 한다. 다시 신부의 도우미가 표주박 술을 신랑에게 갖다 주니 역시 신랑이 신부한테 읍을 한 뒤 받아 마신다. 신부는 신랑 쪽 도우미가 주는 술도 역시 마시는 척만 한다. 이 때 신랑 도우미가 안주로 콩나물을 신랑한테 먹이는데 소태나무껍질을 삶은 물에 무치고 젓가락도 소태나무가지로 만든 것이어서 그 쓰디 쓴맛에 진저리가 처짐에도 애써 참느라 신랑의 심사가 여간 고달픈 게 아니다. 세 번째 잔이 ‘부부됨을 서약하는 의식(誓配偶禮)’을 위한 것인데 신랑과 신부의 표주박을 서로 바꾼다. 신랑의 잔을 위로, 신부의 잔을 밑으로 해서 바꾼 표주박의 술을 마시되 술을 땅에 쏟아서는 안 되며 안주도 들지 않는 법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신랑과 신부 모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중에 어찌 될갑세 까다롭고 지루한 절차가 끝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합근례를 마치면 이것으로 초례, 즉 혼례식의 절차가 끝났다.

예식을 마치고 간단히 요기를 하며 방에서 휴식을 취한 뒤 땅거미가 몰려오기 전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대절한 택시(‘시발택시’거나 ‘새나라택시’였다!)에 오색종이테이프를 이리저리 휘감고 풍선이며 빈 깡통을 주렁주렁 매달아 보는 것만으로도 요란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숙한 체 얌전을 떨던 신부마저 분위기를 띄우는 신랑친구와 동네총각들의 장난 추임새에 잔뜩 웃음을 머금고는 차에 올라타 “댕그렁 댕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동구 밖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시골에선 좀체 보기 드문 볼거리였다.

전통이 퇴색된 신식 결혼식에 대한 아쉬움

#. 내가 처음 신식 결혼식을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6년 서울 청량리의 예식장에서 거행된 사촌 큰 누님의 혼인 때였다. 동네에서 맨날 ‘구식 결혼’만 보다가 모처럼 서울까지 가서 봐서 그런지 너무나 생경하면서도 신선해 그날의 장면들이 지금껏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집안 형뻘인 지역 국회의원의 주례로 진행된 결혼식에는 우리 동네(면)는 물론 군내 웬만한 유지들은 거의 참석해 청량리 일대가 우리 손님들로 북적거릴 정도였는데, 당시 서른이 넘어 노처녀로 꼽혔음에도 드레스를 입은 누이가 얼마나 곱고 예뻤는지….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예식장 안은 시종일관 엄숙한 분위기여서 신랑신부를 향해 농담을 하거나 옆에 들릴 정도로 떠들고 웃는 소리가 일절 없었다. 요즘 으레 빠지지 않는 축가와 케이크 절단, 부케 전달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비록 형식과 절차는 신식으로 따르지만 속으론 사당에 고하는 것으로 혼례를 시작하는 전통의 신성·엄숙함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결혼식의 이 같은 분위기는 핵가족화가 가속되고 자녀수마저 단출해지면서 1980년대 들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 요즘엔 신성과 엄숙은커녕 즐거운 분위기를 넘어 ‘장난판’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예식을 주관하던 주례가 없어진 것은 그렇다 치고, 그 역할을 신랑 아버지가 하고, 신부 아버지도 뒤질세라 ‘덕담’이라는 명분으로 ‘주례사’를 해댄다. 주례가 시답지 않다며 없앤 게 외려 두 명으로 늘어난 셈이니 하객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수밖에.

전통혼례에선 초자례(醮子禮), 초녀례(醮女禮)라고 해서 예비신랑, 예비신부가 혼인식을 위해 집을 떠나기 전 부모 앞에서 키워준 것에 대한 감사와 함께 “결혼해 잘 살겠다”고 약속(誓父母禮)하면 각자 아버지가 축하와 당부를 하지, 이렇게 무례를 떨지 않는다.

더욱 꼴불견은 성혼(成婚)선언마저 신랑 아버지가 하는 것이다. 성혼선언이란 신랑과 신부가 여러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인서약을 했다는 것과 이를 통해 하자 없이 부부가 됐음을 공증(?)선언하는 것인 만큼 제 3자가 하는 게 상식인데 관계자가 버젓이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 예전엔 결혼하면 으레 ‘백년해로(百年偕老)’란 말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사에선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이란 관용구와 함께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부부간의 극진한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은 ‘동실동혈(同室同穴)’이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아내에게 바치는 시(贈內) 가운데 ‘살아서는 한 방에서 금슬 좋게 지내고(生爲同室親)/죽어서는 한 무덤에 함께 묻혀 흙이 되기를(死爲同穴塵)’이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그는 ‘모쪼록 소박함을 지키어나가(庶保貧與素)/기쁜 마음으로 해로하길 바라네(偕老同欣欣)’라고 끝을 맺고 있다. 그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를 통해 ‘연리지(連理枝) 사랑’을 노래한 시인답게 그는 진정한 애처가(愛妻家)였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탁월한 감수성이 아내와 사랑을 일구는데도 남달랐으리라.

이혼을 밥 먹듯 하는 요즈음 이런 담론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결혼할 때만큼은 신랑과 신부 다 이런 마음이 아닐까?

‘머리 묶어 부부 되어 잠자리 같이 했으니(結髮同枕席)/황천까지 함께 벗하리라(黃泉共爲友)!’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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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0 08:32:05
신부아버지처럼 그날 의미있는사람이
어디있다고 장난이됐다고?
제목이 편협하고 얄팍한 인성의 꼰대가 쓴글같다
아침부터 보기 거슬린다

그늘 2018-10-14 10:48:13
어이가 없어서 굳이 댓글 남깁니다. 현재 결혼식 문화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통이라고 해서 전부 옳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은 계속 이어가야겠지만 좋지 않은 것은 버릴 줄도 알아야 스스로 발전하는 인간다운 일 아니겠어요? 잘 알지도 못하는 남보다 나를 길러주시고 제일 잘 아는 부모님께 덕담을 듣고 결혼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가 아니꼽고 무례하게 느끼시는지 모르겠으나, 기자님이 저의 지인이 아닌 것이 무척 기쁘고 감사하네요. 기자님처럼 생각하시는 분이 저의 결혼식에 와서 혀를 차는 것을 상상했더니 소금이라도 한 말 뿌리고 싶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