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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23 19:08 (화) 기사제보 구독신청
패기와 통찰의 기업가, 시대의 표상이 되다
패기와 통찰의 기업가, 시대의 표상이 되다
  • 이기동 기자
  • 승인 2018.08.31 1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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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SK 선대회장 20주기 맞아 기업가정신 재조명

 

[인사이트코리아=이기동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선친, 최종현 선대회장의 20주기(지난 8월 26일)를 계기로 그의 기업가정신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가 생전에 보여준 남다른 혜안과 개척자적 도전 정신이 요즘 후배 기업인들의 다소 위축된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 학자들, 재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토론하기를 즐겼던 최종현 회장은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지닌 기업가였다. 그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철저히 준비하고 도전하는 자세로 초지일관했다. 그 결과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고,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 화를 완성했다. 또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로 ICT 강국의 기반을 갈고 닦는 업적을 이뤄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8월 24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최종현 회장 20주기 추모행사에서 “선대회장은 SK에 좋은 사업들도 남겨주셨지만 무엇보다 먼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혜안과 변화를 만들어 가는 도전정신을 그룹의 DNA 로 남겨주셨다”고 회고했다. 그 만큼 최종현 회장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원대한 꿈을 치밀한 준비(지성)와 실행력(패기)으로 현실로 만든 진정한 기업가였다. 그에게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희망이었다. ‘불가능’은 미래를 내다보고 치열하게 준비하지 않은 사람의 핑계에 불과했다.

최종현 회장은 자본·기술·인재가 없었던 1973년 당시 선경(現 SK)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했다. 섬유회사에 불과한 SK가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필름·원사· 섬유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는 장기적 안목과 중동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 공)를 품에 안았다.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

최종현 회장은 유공 인수 당시 걸프 지분 인수를 위해 비밀리에 만든 태스크포스 팀장을 직접 맡아 맨앞에서 진두지휘했다. 유공 인수로 기세를 올린 그는 1983년부터 해외유전 개발에 도전장을 던졌다.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뚝심 있게 밀어부쳐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개 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최종현 회장은 줄곧 ‘큰 사업’을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을 갖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해 왔다. 울산 콤플렉스가 완공된 1991년 그는 “섬유업체 경쟁자들이 줄곧 섬유에만 매달릴 때 나는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며 “플랜을 갖고 경쟁하는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밝힌바 있다.

최종현 회장은 ‘미래설계’야말로 그룹 총수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운 이유이기도 했다. 이후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은 그는 미국 ICT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해 이동통 신사업을 착실히 준비했다.

“큰 사업은 운(運)만으로 할 수 없다”

오랜 기간 앞선 준비 끝에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 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의 사돈 특혜 논란이 일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그는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며 내부 임직원들을 다독였다. 실제로 2년 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는 꿈을 이뤘다.

당시 주당 8만원 대이던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하자 주변에서 재고를 건의했다. 하지만 최종현 회장은 “이렇게 해야 나중에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회사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며 설득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다. 우리는 기업을 산 것이 아니라 통신사업 진출의 기회를 산 것이다. 기회를 돈만으로 따질 수는 없다”며 임원들을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예상대로 1994년 인수한 한국이동통신은 오늘날 SK텔레콤이라는 세계적 이동통신 회사로 성장했다. 한국을 ICT 강국으로 만드는 초석을 다진 그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SK그룹의 양대 축인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 사업이 M&A를 통한 ‘운(運)’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그는 “운으로는 큰 사업을 할 수 없다”며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그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유공 인수, 정보통 신사업 진출 등 남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사업 다각화를 위해 10년 이상 준비한 결과”라고 담담하게 밝혔다.

“경제를 도우려는 정치논리 재정립 시급”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두 번 역임할 정도로 재계 리더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1993~1995년에 이어 1997년 또 다시 전경련 회장을 맡았지만 건강이 ‘거목’의 발목을 잡았다. 공교롭게도 1997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병마와 싸울 때 경제 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는 환란(IMF)이 일어나기 전에 국가가 경제적 위기에 놓일 것을 예측하고 이를 정부에 알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폐암수술을 받은 그는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경제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고 정부에 경제 살리기를 호소하는 등 투혼을 바쳤다. 하지만 그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98년 8월 26일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당시 최종현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손병두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휠체 어를 탄 채로 청와대에 들어가 ‘비상조치를 늦추면 나라 경제가 큰일 난다’며 정부를 채찍질하는 일에도 서슴치 않았다”며 “최종현 회장이야말로 진정한큰 어른이자, 비즈니스 스테이츠맨(재계 외교관)”이 라고 평가했다. 그는 “최종현 회장이 대통령에게 ‘비 상수단을 쓰고 금리를 낮춰달라, 규제를 풀어달라’ 는 세 가지를 강력히 주문했다. 나중에 김영삼 대통 령을 만났더니 ‘최종현 회장의 금리를 낮추자는 얘기를 들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더라. 곧이어 외환위기가 터지고 말았다”고 떠올렸다.

최종현 회장은 1993년 이코노미스트클럽이 주관한 ‘국가경제력 강화를 위한 제언’ 강연 중 “국가경쟁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며 국민과 정부, 기업의 총체적 역량에 의해 좌우 된다”며 “경제를 지배하는 정치논리가 아니라 경제를 도우려는 정치논리를 재정립하는 것이 우리 나라에 필요한 국가과제”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기업은 사회에 책임 아닌 빚을 지고 있는 것”

최종현 회장은 SK의 성장조차 불투명했던 1970년 대부터 인재양성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비록 대한민국이 아직은 개발도상국이자 자원빈국 처지이 지만 인재를 키우면 얼마든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수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최종현 회장은 1972년 조림사업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개발(現 SK임업)을 설립했다.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안되던 시절,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선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재단이다. 재단은 당시 서울 집 한 채 값보다 비싼 해외 유학비용은 물론 생활비까지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재단이 44년간 양성한 인재는 국내외 곳곳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3700여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740명에 달하는 해외 명문대 박사를 배출했으며 80% 이상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양계 최초 예일대 학장인 천명우(심리학과), 한국인 최초 하버드대 종신교수 박홍근(화학과) 등 세계적 석학이 된 이들은 학술교류와 민간외교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인재육성 TV 프로그램 뒤에도 최종현 회장이 있었다. 1973년 MBC ‘장학퀴즈’가 광고주를 구하지 못해 폐지 위기에 놓이자 구원투수로 나선 이가 바로 최종현 회장이었다. 그 해 2월 18일 방영분부터 시작해 SK는 46년째 장학퀴즈를 단독 후원 하고 있다. 그 덕에 장학퀴즈는 국내 최장수 TV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다. 그가 1980년 장학퀴즈 방송 500회를 기념하며 제작진과 식사하던 도중 “장학퀴즈로 벌어들인 돈이 7조원쯤 된다. 기업 홍보 효과가 1조~2조원,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교육한 효과가 5조~6조원”이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평생 인재양성을 통한 기업의 무한한 사회공헌 철학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1995년 울산대공원 조성을 약속하며 했던 다음의 말도 그의 어록에 남아 있다.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

화장(火葬)과 통 큰 기부문화 이끌어

최종현 회장은 폐암으로 타계하기 직전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火葬)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묘지 난립으로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 못하는 것을 평소 안타까워했던 그는 사회지도층 인사 중 처음으로 화장을 택하면서 장례문화를 선도한 것이다.

그의 시대를 앞선 유언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종현 회장 사후 한 달 만에 ‘한국 장묘 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가 결성돼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이 전개될 정도로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최종현 회장 장례가 유언대로 화장으로 치러지자 1998년 20%에 불과했던 화장률은 이듬해 30%를 넘는 등 매년 급증했고, 현재는 82%에 달할 만큼 대중화됐다. SK그룹은 최종현 회장의 유지에 따라 2010년 1월 500억원을 들여 충남 연기군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장례시설을 준공해 세종시에 기부한 바 있다.

더 큰 행복으로 자라고 있는 ‘최종현의 꿈’

최종현 회장이 남긴 경영 DNA는 장남 최태원 회장 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100년을 내다보고 준비한 끝에 SK를 직물회사에서 석유 화학과 정보통신을 아우르는 그룹으로 성장시켰다면 최태원 회장은 2011년 하이닉스 인수 등을 통해 반도체와 바이오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 인수 직후 “하이닉스가 SK 식구가 된 것은 SK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을 실현하는 의미가 있다”면서 30년 전 최종현 회장의 못다 이룬 꿈을 언급했다. 최종현 회장이 1978년 미래 산업의 중심이 반도체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선경반도체를 설립했으나 전 세계를 강타한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어야 했던 과거를 회상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1998년 취임할 당시 SK그룹은 매출 37조4000억원, 순이익 1000억원, 재계 순위 5위였 다. 현재는 매출 158조원, 순이익 17조3500억원, 재계 순위 3위로 점프했다. 또한 최종현 회장의 사업보국과 사회공헌 경영철학은 최태원 회장의 사회적 가치와 공유 인프라 전략 등으로 발전해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더 큰 행복’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항수 SK그룹 홍보팀장(전무)은 “최종현 회장의 혜안과 통찰 그리고 실천력은 후대 기업인이 본받 아야 할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며 “SK그룹은 앞으 로도 최종현 회장의 경영철학을 올곧게 추구해 사회와 행복을 나누는, 존경받는 일등기업으로 지속 성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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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최종현 회장 어록

“석유는 한 번 쓰면 없어지지만 인간 능력은 무한”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봐도 조건 없이 지원 하겠다.”(1973년, 광고주를 구하지 못한 ‘장학퀴즈’ 후원을 결정하면서)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되고 SK는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인재양성 100년 계획을 세워 지식산업 사회를 구축해 일등국가로 발전해야 한다.”(1978년,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 생과의 대화 중)

“ 우리가 장학퀴즈로 7조원 정도를 벌었을 것이다. 기업 홍보가 1조~2조, 인재를 키우고 교육시킨 효과가 5조~6조원 정도 될 것이다.”(1980년, 장학퀴즈 500회 특집 중)

“인간은 석유와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원이다. 석유는 한 번 쓰면 없어지지만 인간의 능력은 사용할수록 향상되고 가치가 커진 다.”(조동성 전 서울대 교수와의 대화 중)

“회사 임원 일부가 ‘해외 유학생 장학금으로 연간 4만~5만 달러는 너무 많다’ 는 의견을 내놓자 최종현 회장은 ‘이왕이면 최고 수준의 장학금으로 합시다. 돈 좀 아낀다고 뭘 하겠소. 그리고 돈 걱정 없어야 24시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지 않겠소’라고 답하더라.”(고등교육재단 이사들과 장학금 관련 대화 중, 정범모 전 서울대 교수 회고)

“석유개발은 한두 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한두 번 실패했다고 중단하면 아무 성과가 없다. 실패에 관해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1984년, 아프리카 유전 개발 실패 이후)

“섬유업체 경쟁자들이 줄곧 섬유에만 매달릴 때 나는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 완성을 위해 줄곧 노력했다. 주변에서조차 믿지 않았던 것을 15년 노력 끝에 해냈다. 플랜을 갖고 경쟁하는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1991년, 울산 CLX 완공 이후)

“ 우리나라 시장경제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필수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공존관계다. 중소기업 도움 없이는 대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1993년, 전경련 회장 취임 후 대중소기업협력위원회 구성에 나서 며)

“지금 2000억원을 더 주고 사지만 나중 일을 생각하면 더 싸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준비했으니 10년 이내에 1조~2조원의 이익을 낼 수 있다.”(1994 년, 한국이동통신 인수비용이 치솟자 반대하는 임원들에게)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유공 인수, 정보통신산업 진출 등 남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절대 운만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없다. 새로운 성장동력원 확보를 위해 10년 이상 준비한 결과다.”(1997년 12월 주간지 인터뷰)

“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1995년, 울산대공원 조성을 약속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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