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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6 20:04 (화) 기사제보 구독신청
유라시아 대초원 지배한 거대제국 ‘돌궐’
유라시아 대초원 지배한 거대제국 ‘돌궐’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8.08.31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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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영토 1000만㎢ 달해…중국 통일왕조 수·당과 쟁패하며 역사 중심에 등장

유라시아 동·서에 걸쳐 대제국 건설한 돌궐

흉노는 유라시아 대초원지역에서 기마유목민이 건설한 최초의 스텝제국으로, 기마유목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흉노는 유라시아 대초원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으나, 한나라와 쟁패하는 가운데 분열되면서 유목민 선비에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졌다(151년).

선비족은 몽골고원 일대를 장악하고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고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남하해 5호16국 시대(304~439년)와 남북조 시대(420~589년)를 열었다. 선비의 남하로 생긴 공백을 틈타 몽골계 유연이 몽골고원을 차지하고 150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또 다른 유목민 투르크계 돌궐에 의해 멸망했다.

중국 ‘주서’(周書)에서는 돌궐을 흉노의 별종이라 했다. 말하자면, 돌궐은 흉노의 후예란 뜻이다. 투르크족에서 부민(Bumin)카간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돌궐을 건국(552년)했다. 그 나라의 정식 명칭은 Kok Turk인데, 이는 ‘하늘의 신성한 튀르크’란 뜻이다. 부민카간을 이은 무한(Mukhan)카간(553-572년)은 최고 전성시대를 열었는데, 돌궐 비문은 그에 대해 “사방에 군대를 보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의 장례식에 중국·티베트·비잔틴·유연·거란·고구려 등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돌궐은 유라시아지역 동서와 남북에 걸쳐 건설된 최초의 대제국이다. 최대 영토가 1000만㎢를 넘었고, 중국을 통일한 수와 당나라와 쟁패하면서 역사의 중심에 등장했다. 그러나 돌궐은 세력이 커지면 분열되는 초원제국의 전례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돌궐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서돌궐로 분열됐다(582년). 둘로 나뉜 돌궐은 국력이 쇠잔해지면서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1년에 각각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30년 암흑시대 동안 당에 대해 끈질긴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마침내 682년 쿠틀룩이란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거의 완전하게 돌궐을 재건해 후돌궐 시대를 열었다. 후돌궐은 720년경 빌게카간 때 최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 시기에 세워진 오르혼 비문은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빌게카간 사후 급속히 약화된 후돌궐은 745년 위구르·당·티베트의 협공을 받아 멸망했다.

동돌궐에 속했던 유목민족은 전통을 유지했으나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화 했고, 이후 원의 지배하에 들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돌궐은 초원지역에서 유목과 오아시스 농경생활을 병행하다가 압바스 왕조의 지배 하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일부 세력은 터키지역으로 계속 서진했다. 서돌궐세력은 960년경 셀주크 장군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튀르크를 건국했다(1037~1194년). 서진을 계속한 셀주크튀르크 일족은 아나톨리아지역(터키)에서 비잔틴제국을 격파하고 룸셀주크를 건국했다(1077년). 룸셀주크 세력약화 후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1세가 오스만공국을 건국(1299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출발이다.

기마유목민 최초로 문자기록을 남기다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은 약 2500년에 걸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활약했다. 돌궐도 바로 이 기마유목민족이다. 기마유목민족은 정주민족과 달리 오랜 기간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기록문화가 취약하다. 그래서 이들에 관한 기록은 정주민족의 시각에서 쓰여 진 것들뿐이다.

스키타이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그 존재를 처음 기록했고, 흉노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언급했다. 이들이 본 스텝지역의 기마유목민족은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비문명과 비문화의 대명사로까지 다루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유라시아 스텝민족의 역사가 왜곡되고,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한 원인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돌궐은 예외였다. 그들은 유라시아 스텝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를 가졌고, 기록을 남겼다. 몽골북부 오르혼(Orkon) 강 주변에서 720~735년경 세워진 돌궐어 비석이 발견됐다. 이 비석은 후돌궐 지도자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인데, 돌궐제국은 물론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 꺼내 새롭게 보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비석의 비문에는 돌궐제국의 건국, 역대 카간들의 업적, 주변국과의 관계, 군사 및 사회제도, 법·관습 등 스텝지역 기마유목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비석은 17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 슈트라흐렌베르그가 포로 생활 중에 발견해 1730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졌는데, 19세기말에 본격적 연구가 진행돼 덴마크 학자 톰센(V.Thomsen)이 판독했다.

이 비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돌궐어 문헌이다. 그런데 이 비문 중 퀼테킨비문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바로 고구려에 대한 것으로, 572년 무한카간이 사망하자 고구려가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다. 이 비문 동쪽 면 40줄 중 네 번째 줄에는 “동쪽의 해 뜨는 곳으로부터 뷔클리(bükli<bök(kö)li<mäkkoli(맥코리)로도 읽는다)…에서 문상객이 와서 애도했다”고 적혀있다. ‘뷔클리’는 ‘맥족 고구려’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는 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존재를 ‘코리’라는 이름으로 알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돌궐과 교류하던 동로마 문헌에 고구려가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후 10세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 이름 했으며, 고려가 남송 및 아랍세계와 교역하면서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널리 소개됐다. 따라서 코리아라는 명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민족구성과 언어, 관습, 문화 등은 물론 이름까지 명백한 한민족 고대국가여서 중국이 시비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돌궐은 중국과 비잔틴제국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실크로드에서는 소그드인이 동서교역을 맡고 있었고, 돌궐의 보호 아래 교역이 이루어졌다. 돌궐은 교역확대를 위해 비잔틴제국과 직접 무역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돌궐과 비잔틴 간에 우호관계가 맺어져 페르시아를 동·서에서 견제하는 구도가 됐다. 이는 중국의 수·당에 대항하는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관계를 갖게 되는 상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고구려에 이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도 돌궐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북방민족 돌궐과 통일중국의 대결

돌궐이 건국되던 시기에 중국은 5호16국 시대를 지나 남북조 시대에 들어섰으며, 돌궐은 북위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북조를 압박하는 등 우월한 지위를 견지했다. 589년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하고, 돌궐은 동·서로 분열되는 큰 정세변화가 일어났다. ‘통일’과 ‘분열’은 향후 양국의 역사전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키워드다. 통일 수나라는 돌궐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돌궐 분열을 더욱 조장하고, 그 결과 더욱 약화된 돌궐을 압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이것이 역사다.

수나라에 이은 강력한 왕조 당나라는 돌궐과 다시 대적하게 됐다. 당나라는 290년간 존속한 통일 왕조로, 중국은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자신을 진시황과 한 무제에 비견했던 당 태종 이세민(627~649년)은 끊임없는 팽창정책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며 숙제는 바로 고구려와 돌궐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 대군을 격파해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했고, 돌궐은 수시로 중국 영역을 공략하면서 국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집념으로 630년 동돌궐이, 651년에는 서돌궐이 당에 멸망했다. 이어 668년에는 고구려 또한 나당 연합군에 패해 700년 역사를 마감했다.

당나라의 국력은 대단했다. 당은 선비계가 세운 왕조로, 당나라 사람은 남북조 시대 이전의 중국 한족의 후예라기보다는 한족과 이민족이 융합한 새로운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당나라는 주변 이(異)민족의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등 개방정책을 통해 융성했고, 전성기에는 교류한 국가가 70여 개국에 달하는 등 중국왕조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국제도시로서 문명과 교통 교류의 허브 역할을 수행했다.

당나라 현종은 서역 장악을 위해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명장 고선지로 하여금 서역 원정을 하게 했다. 고선지는 11년간(740~751년) 다섯 차례 출전했다. 747년 출병 시에는 해발 4600m의 탄구령을 넘는 전설의 진군을 했고, 중앙아시아·파미르·실크로드를 관장하는 안서도호부의 책임자가 됐다. 연전연승하던 고선지 장군은 그러나 751년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타쉬겐트 부근 탈라스강 유역에서 압바스·티베트·돌궐의 이슬람 연합군과 맞선 대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했다.

고선지 군대는 중국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마지막 진출세력이었고, 이 전투의 패배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슬람 세력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고선지 장군은 그 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모함을 받아 죽었다.

대제국 돌궐과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

돌궐 건국 전 몽골고원과 내륙 아시아 지역은 150년간 몽골계 유연이 지배했으며, 유연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이 유연을 멸망(552년)시키고 동진하면서 여러 유목민족과 거란을 복속시킴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국경에 전운이 감돌게 됐다.

돌궐은 고구려와의 사이에 있는 거란 및 말갈족에 대한 정벌전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에 서게 된 것이다. 전성기 돌궐의 무한카간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격퇴했다. 당시 돌궐은 동로마제국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동로마 문헌에 “고구려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투지가 높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국력과 고구려인의 기상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수나라가 건국되고, 돌궐이 동서로 분열되는 582년경 이후에는 고구려와 돌궐은 긴밀한 상호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강력한 수나라의 등장이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를 우호적이고 긴밀하게 바꿨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반면 돌궐세력은 약화되면서 고구려는 홀로 수와 대적하게 되나 끝내 수를 격파하고 침공을 막아냈다.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동·서돌궐을 멸망시킨 후 팽창정책을 지속했고, 돌궐 없이 홀로 남은 고구려는 영류왕과 연개소문 시대에 단독으로 최강의 당을 상대하다가 668년 결국 멸망했다. 강한 북방 유목민족국가가 존재할 때는 중국을 견제해 고구려가 안정될 수 있었으나, 북방세력이 쇠퇴할 때는 강국 고구려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682년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당이 다시 돌궐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세력의 공백기가 생겼고, 이를 이용해 고구려 후예들은 만주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여 한민족사의 남북국 시대(신라+발해)를 열었다.

중국 통일 후 돌궐의 분열과 멸망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후돌궐의 부활은 고구려의 부활(발해의 건국)로 연결됐다. 이는 초강대국의 등장에 따른 인접국가의 운명과 이에 맞서는 전략에 관한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는 대목이어서, 오늘날의 동아시아 정세를 판단할 때도 참고 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고 보여 진다.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 시대에는 고조선과 흉노의 협력을 경계했고, 수·당시대에는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을 경계했다. 이것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인 통일중국왕조의 대외전략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외교정책의 기본인 것이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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