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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채용비리 공화국...노량진 공시생들 "빽 없어 무력하다"
[르포]채용비리 공화국...노량진 공시생들 "빽 없어 무력하다"
  • 이일호 기자
  • 승인 2018.02.02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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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개 공공기관 중 80%서 비리...분노에 지쳐 이제는 체념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역 학원가 일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역 학원가 일대.<인사이트코리아>

[인사이트코리아=이일호·강민경 기자]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던 때부터 주창해 온 철학이다. 지금은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공기관 채용에는 ‘불공정한 과정’과 ‘부정의한 결과’가 차고 넘쳤다. 1190개 공공기관 중 79.5%에 달하는 946곳에서 비리가 발견됐고, 이 가운데 33곳은 수사 의뢰됐다. 추운 겨울 밤낮없이 시험을 준비하는 30만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의 마음에 한파가 몰아닥치는 이유다. 수십년 째 ‘공시촌’으로 자리매김한 노량진 학원가를 찾아가 은행·공기업의 채용비리에 따른 공시생들의 좌절감과 분노를 들어봤다.

2일 오전 11시 20분,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역은 대로로 나뉘어졌다. 번화가인 역 쪽은 점포와 사람들로 붐볐지만, 대로 건너편 학원가는 비장할 만큼 한산했다. 지나가는 버스마저 고요했다. 35년간 양쪽을 잇던 육교가 2015년 철거된 이후 양쪽 분위기는 극적으로 나뉘었다. 90년대 구도심 같은 학원가 건너편으로 거대한 63빌딩이 눈에 띈다.

“이젠 하도 보니 감흥도 없어요.” 공기업 취업준비생 A씨(27)에게 63빌딩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시원에서 지내며 친구와 함께 2년째 한국가스공사 지원을 준비 중이라는 A씨는 최근 채용비리 소식이 불안하다고 했다. “지난해 친구가 한국가스공사 최종시험에서 떨어졌는데, 그해 9월 가스공사 채용비리 기사가 터졌어요. 그때는 화가 났는데 올해 또 공기업 채용비리 소식이 들려서 걱정되네요.”

"누구는 밤샘 공부하고, 누구는 빽으로 붙는다"

노량진역 학원가 근처 롱 패딩을 입은 학생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노량진역 학원가 근처 롱 패딩을 입은 학생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인사이트코리아>

학원가 쪽으로 간간히 학생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두터운 롱 패딩에 한 손에 교재를 들고 종종걸음이었다. “저 수업 들으러 가야돼요.” 길 가던 한 학생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미안한 얼굴로 외마디 답변만 남긴 채 발길을 재촉했다. 롱 패딩들의 발길은 하나 둘씩 학원가 골목으로 이어졌다.

노량진에는 각양각색의 학원들이 있다. 대로변에는 대학 입시학원이, 골목골목으로는 경찰·소방공무원 5급·7급·9급 공무원 학원이 자리 잡고 있다. 1995년 9만8000여명이던 공무원 시험 지원자 수는 2016년 28만9000명으로 3배나 늘었고, 해가 갈수록 이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낮 12시 즈음 학원 건물 곳곳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쥐 죽은 듯 고요했던 학원가는 점심 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취준생들로 붐볐다. 한 경찰공무원 학원 1층 편의점에서 B씨(30)가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지 않느냐고 묻자 “돈이 아까워서요. 한 달에 학원비만 70만원 남짓 들어가요”라고 답했다.

재작년부터 경찰 공시를 준비 중인 B씨는 최근 채용비리 소식에 “그나마 채용 청탁에 가장 깨끗한 곳이 경찰공무원이라고 들었는데, 지난해 말 국정농단 사건 때 경찰 채용비리가 낱낱이 드러났다”며 “공시생 입장에선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니 이런 비리가 자꾸 생겨나는 것 같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B씨는 식사를 시작한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공부하러 올라간다”며 자리를 떴다.

노량진 근처 한 학원 1층 편의점에서 공시생이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인사이트코리아>
노량진 근처 한 학원 1층 편의점에서 공시생이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인사이트코리아>

2017년 기준 5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41.1 대 1, 7급은 66.2. 대 1, 9급은 46.5 대 1에 달한다. 그나마 2016년보다 채용인원이 늘어나전반적으로 경쟁률이 조금씩 떨어졌다. 하지만 전체 지원자들 중 합격자는 단 6000여명, 2%에 불과하다. 불합격한 28만7000명은 이듬해를 기약하거나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노량진 골목 한쪽에 컵밥집이 눈에 띄었다. 덮밥과 쌀국수, 떡볶이, 고기 등을 컵에 담아 파는 이곳은 저렴한 식사를 찾는 취준생들의 단골 음식점이 됐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는 식당 주인 D씨는 “기분 탓인지, 날씨 탓인지 모르겠지만 수험생들 표정이 요즘 따라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분노 뛰어넘어 무력감 느끼는 공시족들

전국에 공시족은 30만 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노량진 공시족은 학원가 추산 5만 명에 육박한다. 삶이 치열해지고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공무원처럼 보다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찾는 젊은이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공무원 채용 인원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젊은이들의 발길을 공시촌으로 이끌고 있다. 노량진 상권이 커지면서 ‘88만원 세대’ 젊은이들의 취업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노량진 인근 한 학원에서 공시생들이 공부하고 있다.<인사이트코리아>
노량진 인근 한 학원에서 공시생들이 공부하고 있다.<인사이트코리아>

공시로 유명한 한 학원에 올라가보니 식사를 마친 C씨(39)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해 말부터 7급 외무행정직을 준비 중인 C씨는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공부한다고 했다. “1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누구는 ‘빽’으로 쉽게 붙는다는 사실에 분노를 뛰어넘어 무기력감을 느껴요.”

이날 노량진에서 만난 공시생들은 하나 같이 잇따른 채용비리에 화를 내기보단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을 먼저 표명했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불공평하다는 것에 대해 체념한 듯 했다.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겠지만, 조금 갑갑해요. 채용비리에 연루된 사람들이 과연 장시간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공시생들의 입장을 생각해봤는지 궁금해요.” C씨의 얼굴 한켠에 우울함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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