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8-02-19 05:11 (월)
눈송이 소년 ‘왕푸만’과 ‘웃픈 추억’
눈송이 소년 ‘왕푸만’과 ‘웃픈 추억’
  • 이만훈 언론인
  • 승인 2018.02.05 14: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바람 추위 몸으로 때우던 시절…그때가 없었다면 오늘도 없다
'눈송이 소년'으로 화제를 모은 왕푸만.홍콩 사우스차이나포스트 캡처
'눈송이 소년'으로 화제를 모은 왕푸만.<홍콩 사우스차이나포스트 캡처>

올해 들어 유난히 동장군(冬將軍)의 위세가 세계적으로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다. 지구적인 한파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중국 윈난(雲南)성의 한 시골 초등학생이 추위 속에 등교하면서 눈사람처럼 된 사진과 함께 전해진 이른바 ‘눈송이 소년(氷花男孩)’ 소식이 그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왕푸만(王福滿·8)으로 윈난 성 자오퉁시(昭通市) 루덴현(魯甸縣) 쭈안산바오(轉山包)초등학교 2년생인 시골 소년이다. 그는 아빠가 돈 벌러 멀리 떨어진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두 살 터울의 누나와 함께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민공의 자식이자 유수아동(留守兒童)으로 4.5km쯤 떨어진 학교에 걸어서 다닌다.

푸만이 사는 윈난성은 ‘일 년 내내 날씨가 봄 같다’고 해서 ‘춘성(春省)’이라 불리기도 하는 곳으로 중국인들이 ‘샹그릴라(香格里辣)’의 본향(本鄕)이라고 우겨대는 땅이다. 그런데 이번 한파의 기습은 이곳도 피할 수 없었던 지 올 들어 영하의 날씨가 이어졌고, 푸만이가 눈사람이 된 바로 그날은 무려 영하 9도나 되는 ‘혹한(酷寒)’이었다. 혹자는 영하 10도도 안되는데 무슨 혹한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평소엔 한겨울에도 줄곧 봄 날씨인 곳이란 걸 감안하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몇 년 전 인도의 한 도시에서 영상 14도의 날씨 속에 무려 열댓 명이 저체온 증으로 사망한 사실을 상기해보라).

어쨌거나 그날도 푸만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평소에도 습기가 많은 이곳에 이날따라 눈이 내리는 바람에 그의 머리는 온통 백발이 되었고, 눈썹마저 하얗게 얼어 세어버리고 말았다. 이 같은 푸만이의 모습을 본 담임교사가 사진을 찍어 1월 9일 SNS에 올려 13억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 소년 ‘왕푸만’, 나 어릴 적 겨울날 떠올려

나는 TV를 통해 처음 이 소식을 접하곤 얼마나 가슴이 아렸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리도 어릴 적 내 모습과 맞춤으로 닮았는지….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고, 신문을 오리고 하면서 소식이 더 없는지 속보를 챙기고, 또 챙기면서 한참 동안 속울음을 울었고, 어느새 나의 ‘푸만이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나도 집에서 5km쯤 떨어진 ‘초등학교(1996년 3월 1일부터 초등학교로 바뀌었다)’에 걸어 다녔다. 당시엔 그저 시오리길이라고 했다. 겨우 마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3km쯤 걷고 나면 자동차가 다니는 ‘행길’이 나오고, 그 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다시 2km를 걸어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서 비탈길을 걸어 조금 내려가면 산기슭 낭떠러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난 길이 나오는데 한겨울엔 너태가 져 늦은 봄까지 어린 것들의 통행에 두려움을 주곤 했다. 또 통학 길 중간쯤에 제법 큰 개울이 있어 물굽이가 진 여분댕이에 서덜이 있고 그 앞 물가엔 꽤 그럴싸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름하여 ‘강다리 뻘’로 통하던 그곳에서 여름엔 씨름이나 닭싸움을, 겨울엔 불놀이를 하고 놀았는데 이따금씩 동네 간 패 싸움장이기도 했던 이곳으로 가려면 꽤나 깊은 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아슬아슬 건너야 했다.

하지만 한 번도 학교가 멀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도, 형들도 죄다 다닌 길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윗동네, 그 윗동네, 그 그 윗동네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그 정도 걷는 일은 약과로 여겼다. 심지어 어떤 친구들은 제법 큰 산을 넘어 서너 시간을 걸려 족히 10km가 넘는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으니까!

이번 ‘눈송이 소년’ 기사를 보면 ‘목도리와 장갑을 하지 않은 채 걸어서 등교하다 이런 모습이 된 것’이라면서 유난히 빨간 볼을 클로즈업시켰다. 우리의 ‘푸만이 시절’은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반 푼(半分)이라도 덜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 땅에도 찬바람이 불기 무섭게 애, 늙은이 할 것 없이 ‘덕다운(duck down)’이니 ‘구스다운(goose down)’이니 하면서 에베레스트 꼭대기에서도 끄떡없을 차림들을 하지만 그 시절엔 개 코나 그런 것들이 없었다.

대신 엄마가 광목을 잡아 만들어준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녔고, 그나마 좀 형편이 되면 시장에서 파는 검정 학생복을 겨우내 애용(!)했다. 한 번 빨면 검은 물이 절반은 빠져 희끄무레해지고 소매와 가랑이의 기장이 확 줄어 영락없이 얻어 입은 꼴이 되곤 했지만 그래도 솜바지 저고리보다는 신식(新式)이라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당시엔 영하 15~20도는 예사였던 터라 아무리 내복을 받쳐 입더라도 홑겹 때기 학생복으론 가당치도 않았지만 칼바람이 쌩쌩 부는 시오리길 등교를 단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은 감기에 심하게 걸려 온몸이 불덩어리인데도 “배워야 산다”는 엄마의 호령에 떼밀려 끝내 학교 수업을 다 마치고 왔을 정도였으니까(그 시절엔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랬다).

옷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라도 제대로 갖추었으면 좋으련만 그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소똥’이 그득한 빡빡 머리에 여기저기 기계충이 먹은 자리하며, 헌데가 말씀이 아닌 지경임에도 버빠깨는커녕 민자 모자 하나 없이 그 추운 겨울 하늘을 이고 다녔다. 하지만 개중에 어떤 놈은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지만 앞 챙에 ‘UN’이라고 큼지막하게 글자가 씌어있는 구호품 방한모자를 눌러쓰고 으스대기도 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모자가 없으니 정수리가 시리게 마련이지만 바람을 안고 한참을 뛰다 보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머리에선 오히려 모락모락 김마저 올랐다. 하지만 허공에 그대로 노출된 양쪽 귀때기만은 어쩔 수 없어 늘 떨어져 나갈 듯한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어느샌가 형들이 눈 덮인 산에서 올무에 걸려있는 토끼를 걷어와 털 귀걸이를 만들어줄 때까진 겨울마다 늘 그렇게 귀 고문을 당해야 했다.

거기에다 내복이란 것도 하도 여러 번 꿰매고 꿰매 누더기를 두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판에 목도리라니…. 더구나 장갑은 커니와 양말도 없어 심지어 헝겊으로 감발(발싸개)을 한 채 바닥이 닳아 창이 난 고무신을 신은 친구들도 보기 어렵지 않던 시절임에랴!

나는 그래도 양말은 신을 수 있었는데 옷과 마찬가지로 물림 한 것들이라 덧대 기운 조각들이 원판보다 많아 얼룩덜룩한 것이 그야말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였다. 정말 모든 게 엉터리였다.

‘푸만이 시절’의 우리가 혹한을 이겨낸 방법들

형편없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들이 늘 씩씩할 수 있었던 것은 한없이 억세면서도 따뜻한 엄마들의 손길과 지혜 덕분이었다. 신발을 부뚜막에 엎어놓아 뜨거울 정도로 덥힌 다음 신기고, 한쪽에선 화롯불에 구운 쥠성 좋은 돌멩이 두 개를 종이와 헝겊에 이중으로 싼 뒤 조막만한 자식 손에 쥐어주시곤 했다. 대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신발은 도루 얼음장처럼 돼버리지만 돌멩이 손 난로는 얼추 교문이 눈에 들어오는 어름에까지 온기를 지켜주곤 했다.

여기에다 당원(糖源)으로 감탕을 한 막걸리를 따끈하니 데워 한 사발 마시게 했으니 속은 후끈후끈하고 정신은 반쯤 취해 추위가 미처 느껴질 새가 없었다. 절반은 얼어서, 절반은 술기운에 볼 따귀가 볼그족족 물든 채 달려가곤 했던 등굣길-. 그래도 얼추 얼근한 기분이 사그라들 참이면 이미 교문을 들어서곤 했다. 얼굴로만 치면 매일 해장술 기운으로 공사장에 들어서는 막일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70대 겨울 한 초등학교 교실 풍경.인터넷캡처
1970대 겨울 초등학교 교실 풍경.<인터넷캡처>

우리가 단 한 가지 푸만이네보다 나았던 것은 교실에 난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보도에 따르면 푸만이네 학교는 난방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매년 강추위가 몰아치곤 하는 터라 울 학교에선 12월만 되면 교실마다 난로가 놓였다. 연료는 석탄가루를 황토와 섞어 조막만 하게 빚은 조개탄이었는데 화력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학교마다 배정 양이 턱없이 적어 쏘시개로 마련한 솔방울이나 장작을 땔 적도 거지반이나 됐다. 그래서 학생들이 돌아가며 땔감을 마련해야 했고, 그 바람에 겨울철 등교 때는 동네 골짜기마다 ‘걸빵’으로 장작 짐을 진 조무래기들이 마치 장 보러 떠나는 도붓장수들 마냥 눈보라 속을 헤집고 숲속 오솔길이나 논둑길을 따라 나래비로 늘어서 다니는 장면이 심심찮게 연출되곤 했다.

난로 당번이 걸리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먼저 등교해 미리 난로를 피워놓아야 했기 때문인데 불을 붙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창고에서 조개탄을 한 ‘바께쓰’ 타온 뒤 잘게 쪼갠 장작이나 솔방울에 먼저 불을 붙인 다음 밑불이 넉넉하다 싶을 때 조개탄을 그 위에 올려놓으면 되는데 밑불의 세기에 맞춰 타이밍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연기만 피워대다 교실을 온통 ‘오소리 굴’로 만들어 제시간에 도착한 친구들로부터 원성은 원성대로 듣고 담임 선생님한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나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것들이 뭐 할 줄 안다고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먹을거리 없던 시절, 유난히 더 추웠다

1970년대 겨울날 어린 학생들이 연탄을 나르고 있다.인터넷캡처
1970년대 겨울날 어린 학생들이 연탄을 나르고 있다.<인터넷캡처>

이번 ‘눈송이소년’ 기사를 보면서 유난스레 눈에 들어온 것은 ‘왕 군은 돈이 없어 주로 밥과 채소로 끼니를 때운다’는 대목이다. 배가 고프면 춥게 마련이고, 배가 부르면 웬만한 추위도 참을만하니까.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 집은 조상님들 덕분에 삼시 세끼는 거르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여름엔 냉수에 밥을 말아 오이지 한 쪽이면 그만이고 한겨울엔 내내 김장독에 코를 묻고 살았으니 딱히 반찬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처지는 푸만이네와 ‘도긴개긴’이었다. 고기라곤 설날과 추석, 그리고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생신 때나 구경할 수 있었고, 그것도 식구가 많다 보니 국이나 찌개에 넣어 한껏 국물로 우려먹는 게 고작이었다.

이나마도 다른 집들에겐 더 없는 호사였다. 오죽하면 어른들 사이에 “이팝에 고깃국 한 그릇이면 진량”이라는 말이 평생소원 같은 입버릇으로 유행했을까.

실제로 친구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밥을 먹지 못하고 컸다. 사시장철 고구마나 감자가 주식이었다. 한 친구는 제법 공부를 잘 했는데 4학년 겨울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솥을 열어보니 고구마조차 없는 데 절망해 그길로 무작정 서울로 가 결국 조폭 소굴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점심때면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옥수수 죽을 나눠줬다. 하지만 요즘의 무료급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미 공법(美公法· Public Law) 480호에 의거해 지원되는 구호식량(포대에 악수하는 그림이 있어 그냥 ‘악수표’라고 했다)으로 그나마 절대 양이 부족해 그야말로 멀겋기 그지없는 ‘옥수수 도강탕(渡江湯)’이었다. 그래도 한 국자라도 더 먹었으면 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목을 늘이던 모습이 교실마다 가득했었으니….

그 시절엔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방학을 늘렸는데 그동안 허기라도 면하라는 뜻으로 방학 날 옥수수 가루(옥수수죽 급식이 있기 전에는 일 년에 두 번 분유를 준적도 있었다)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봤자 ‘벤또’로 하나를 주고 석 달 가까운 동안 굶어죽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지만.

사정이 이런 지경에서 당연히 영양실조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얼굴이 누렇게 뜬 것은 기본이고, 공연히 헛배가 부르거나 살갗이 누르면 한참 있다 나오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날씨가 춥기도 했지만 워낙 기름기라곤 없다보니 찬바람만 스쳐도 손등 발등은 물론 양 볼이 그냥 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쩍쩍 갈라지곤 했다. 거기에다 손발가락하며 코끝, 귀때기는 동상에 걸려 진물이 흐르고, 콧구멍에선 구렁이 같은 싯누런 코가 입으로 흘러들어 시도 때도 없이 훌쩍대다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따금씩 옷소매로 훔치는 바람에 콧물로 도배를 한 자리가 거울처럼 빛나던 친구, 친구들-. 아~ 옛날이여!

추위 겪지 않았으면 따뜻함 알았을까

‘눈송이 소년’ 덕분에 모처럼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반 백 년이 흘렀음에도 좁쌀만 한 일들까지 삼삼하다 못해 더 이상 뚜렷할 수 없을 정도로 최신 영화처럼 줄줄이 펼쳐진다.

하지만 어쩌랴! 멀쩡하게 눈을 뜨고도 코를 베이는 세상이라 순박하기만 했던 그 시절이 언뜻언뜻 그리울 때도 있지만 굳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요즘 젊은이들이 잘 쓰는 말로 ‘웃픈 추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추억여행을 통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오늘 햇살이 이다지도 밝고 따뜻할 수 있음은 정말 ‘거지같은 일’이 더 많았던 그 시절, 아무래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지만 그 검은 터널을 벗어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죽기 살기로 쳐댄 몸부림의 후과(後果)임이 분명하니까.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비록 오늘이 ‘88만원짜리 인생’이니 ‘3포 청춘’이니 하며 자조(自嘲) 속에 좌절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게 사실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묻는다. 그대들은 적어도 ‘눈송이’가 된 적은 없지 않느냐고.

물론 행복과 희망은 상대적이고, 우리는 커니와 우리보다 몇 곱절 더 지난(至難) 한 세월을 겪은 우리 부모 세대한테는 그 같은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이 그래도 넉넉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이 없었을 테고, 마찬가지로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의 빛깔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오늘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좌절하고 포기한다면 내일은 보나 마나 여전히 ‘검은 상처의 블루스’일 뿐일 테니까.

이른바 ‘전후 베이비’인 내 또래들이 그랬듯이 중국의 푸만이도 보다 나은 앞날을 꿈꾸며 ‘눈송이 됨’을 마다하지 않고 이 겨울을 버텨내고 있다. 오늘날 중국 땅 곳곳에는 ‘푸만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G2를 자처하며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를 향해 온갖 졸부 짓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게 또한 현실의 중국이다. 그러니 그 넓은 땅에서 더 이상 ‘눈송이 소년’을 찾아 볼 수 없게 되는 날 그들의 ‘패악질’이 어느 정도일지 사뭇 공포스럽기조차 하다. 그나마 중국에 지금처럼 푸만이가 많이 있을 때 우리한테 희망이 있다. 그들의 행패에 맞설 수 있는 맷집을 키울 수 있는 그런 기회 말이다. 주위로부터 “꼰대 같은 넋두리 좀 작작 하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굳이 이렇게 ‘맨땅에 헤딩’해야 했던 ‘쌍팔년도 얘기’를 늘어놓는 까닭이다. 어둠을 모르면 빛 또한 알 수 없는 법이다.

이만훈 언론인
이만훈 언론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