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그룹 창업자 김재철의 '장보고의 꿈'

바다에 운명을 건 ‘영원한 캡틴'…후배 기업가들에 큰 울림 권호 기자l승인2017.08.01l수정2017.08.0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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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동원그룹>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바다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글로벌 무역의 중심이다. 우리나라에도 해방 이후 글로벌 해양산업에 도전해‘제2의 장보고’라는 별명을 얻은 사람이 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우리나라 재계 창업세대 중 한 명으로 원양어선 말단 선원부터 시작해 자산 4조7000억 원에 달하는 동원그룹을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다. 창업 이후 49년 동안 한 번의 흐트러짐 없는 ‘정도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재계 1세대인 그의 기업가 정신과 불굴의 투지, 반듯한 자세는 후세 경영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인사이트코리아>가 창업 기업가 김재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짚어봤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위험을 감수하고 포착한 기회를 사업화하려는 모험과 도전의 정신”이라고 기업가 정신을 정의했다. 대기업들의 자회사 일감 몰아주기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때 재벌 2, 3세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기업은 산업화 시절 창업한 재계 1세대가 일군 것이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현대그룹을 창업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불굴의 도전정신과 탁월한 수완으로 거대한 기업을 일궈 후배 경영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재계 1세대 중 80대 나이에도 경영 일선에서 투혼을 발휘하는 인물이 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다. 김재철 회장은 원양어선 선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도전과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 지금도 말단 선원으로 배를 탔던 이십 대 같은 열정이 가득할 정도로 그는 청년이다. 김 회장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내가 너라면 서슴없이 바다에 미래를 걸겠다”

김재철 회장이 자란 전남 강진군 군동면은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대다수가 농사를 짓고 학생들 역시 열심히 공부해 농대를 나와 가업을 이어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6남 4녀 중 장남이었던 김재철 회장은 강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김 회장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그의 일생을 뒤흔들게 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오대양을 누빌 시기가 올 것이다. 생각해 봐라.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지하자원도 없는데 뭘 가지고 세계에 나가 경쟁하겠느냐. 바다를 개척하는 길밖에 없다.

바다는 무진장한 자원의 보고다. 우리나라가 더 잘 살려면 우수한 젊은이들이 바다를 개발해야 한다. 내가 너처럼 새로 시작하는 젊은 나이라면 서슴지 않고 바다에 미래를 걸겠다. 너는 이제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시야를 넓혀 장래를 설계해야 한다.”

담임선생님의 충고에 김 회장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립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어로과에 입학한다. 그는 대학 시절 수산학을 공부하고 실습하며 낙후된 우리나라 수산업계의 현실과 수산업 발전을 위해 할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가까운 연안 바다에서는 얻을 수 있는 어족자원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원양의 꿈을 품게 됐다.

김 회장은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둔 1958년 1월,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가 남태평양 사모아로 출항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먼 바다의 꿈을 안고 서울대 장학생까지 거절하며 수산대학 어로학과에 입학한 그였다.

그런 그에게 ‘지남호’는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그는 지남호 관계자들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귀했던 양담배를 사 들고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원양어선을 타겠다는 청년의 말에 당시 관계자들은 “대학졸업생이 뭣 하러 고기 배를 타려고 하느냐”며 쉽사리 승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는 바라지 않는다. 또한, 항해 중에 사고를 당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하고 실습항해사로 간신히 승선할 수 있었다.

실습항해사로 지남호에 승선했지만 정원 외 인원인 그에게 보수는 물론, 침대도 주어지지 않았다. 파도가 큰 날이면 배가 흔들려 바닥에 떨어지기 일쑤인 군 야전용 침대에서 지내야 했지만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 1969년 김재철 회장이 동원산업 창업 당시 일본에서 들여온 원양어선 제31동원호 출어식 때 배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동원그룹>

26세 젊은 선장 ‘캡틴 J.C.KIM’

대학생 신분으로 국내 최초 원양어선인 지남호에 어렵게 승선한 김 회장은 화장실 청소 등 허드렛일부터 해나갔다. 배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어획 준비를 하고, 가장 늦게까지 청소 등 마무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 시절 막내로서 가장 밑바닥 허드렛일부터 경험했던 것이 이후 선장이 되어서 여러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지남호에 승선한 선원들은 참치가 어떻게 생긴 물고기인 줄도 몰랐다. 한국에서 배 좀 탄다는 사람들로 선원을 꾸렸지만, 문제는 원양어업을 경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초보라서 어떤 어종이 비싼지, 또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지남호는 출항 후 47일을 헤맨 끝에 인도양에서 처음으로 사람 키만 한 새치를 낚아 올렸다.

차차 바다에 적응해가던 김 회장은 이러한 모습을 보며 두려움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 수산업계가 수산 선진국과 비교해 너무 낙후되었고 어로기술과 어로장비가 절망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어류도감을 구입해 우선 고기의 종류와 특성부터 연구했다. “배운 사람이 원양어업을 연구하지 않으면 한국 수산업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해 그 분야의 외국자료를 구해 항해 중에도 선진어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배를 탄 지 3년 만인 1960년 말, 김 회장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지남2호의 선장이 됐다. 선장이 된 후에도 원양어선의 업무를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처리했다. 김 회장은 한 마리의 고기라도 더 잡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어장조건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 무렵 사모아에는 일본 어선들을 포함해 80여 척이 조업하고 있었다. 당시 사모아 어장의 가장 큰 고객은 미국 기업 스타키스트(동원그룹이 2008년 인수)였는데, 김 회장은 항상 가장 많은 어획량으로 스타키스트의 환대를 받았다. 김 회장은 20대의 어린 선장이었음에도 ‘캡틴 제이 씨 킴(Captain J.C. Kim)’이란 이름으로 외국 수산업계에서 유명했다.

김 회장은 선장 시절, 태풍이 몰아칠 때 모든 선원이 선장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것을 경험했다. 선장의 표정과 말 한마디에 선원들의 생존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위기 상황에서는 리더의 침착한 자세와 이성적인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선장 경험은 이후 경영자로서 위기가 닥쳤을 때 결단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사모아 최고의 선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 회장은 신생 원양어업체인 ‘고려원양’에 수산부장으로 스카우트 되었고, 이후 사세를 확장한 공로를 인정받아 34세의 젊은 나이에 이사로 전격 승진하며 승승장구했다.
 

35세에 신용을 자산으로 ‘동원산업’ 창업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인들도 김 회장의 성실성과 실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무렵 한 일본인은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왜 독립해서 사업을 하지 않느냐?”라며 독자적으로 원양어업회사를 운영할 것을 권유했다.

김 회장은 심사숙고 끝에 1969년, 35세의 나이에 그동안 모은 1000만 원을 자본금으로 동원산업을 창업했다.

회사는 만들었지만, 배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김 회장은 그간 국내외에 쌓아둔 신용과 ‘캡틴 제이 씨 킴’의 실력을 자산으로 일본 도쇼쿠(東食)社로부터 지불보증 없이 5000톤급 연승어선 ‘제31동원호’와 ‘제33동원호’를 37만 달러에 달하는 현물차관으로 도입했다.

어획을 통해 벌어서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정부의 지불보증 없이 외국으로부터 거액 차관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김 회장의 실력과 신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배를 구했으니, 남들과 다른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제31동원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탑재 모선 식 어선이었다. 500톤급 모선에 20톤급 작은 자선을 싣고 다니면서 조업하는 방식이었다.

제31동원호는 2년간 당시로는 놀라운 금액인 12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며 사업 초기 동원산업의 효자 노릇을 했다.

이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어선을 추가하고 신어장도 속속 개척해 나갔다. 우리나라 어선으로는 최초로 오징어채낚기 조업을 하기도 했고, 훗날 북양 진출의 발판이 될 당시 소련영해에서 명태, 연어, 송어 등을 어획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아프리카 어장으로 출어하면서 대서양까지 진출했다.

어장 개척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김 회장은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본·프랑스·스페인 같은 원양어업 선진국을 방문해 새로운 어로기술을 보고 배우는 한편, 수출시장을 넓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인도양의 타마타브를 비롯해 대서양의 라스팔마스, 테마 등지에 해외기지와 지사가 설치돼 원양어업의 전진기업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2차 석유파동으로 몰아닥친 위기

1973년 10월 제1차 석유파동으로 배럴당 2달러에 불과했던 유가가 1974년 11달러에서 1975년에는 12달러로 6배가량 치솟았다. 석유파동으로 한국경제는 경기침체·물가상승·국제수지악화라는 삼중고에 시달렸다.

석유파동으로 인한 한국경제의 위기는 급성장해 가던 한국 원양어업계를 강타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각국은 200 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원양어선의 어로원가 가운데 유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40%가 넘기 때문에 석유파동으로 도산하는 업체들이 속출했다.

더욱이 김 회장은 1969년 회사를 시작할 때 어선을 분할 상환 식으로 매입해 운영하고 있었기에 배 값의 상환과 선박운영의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방침을 수립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한일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기존의 주력 사업이었던 참치잡이를 기지 어업에서 독항 어업으로 과감하게 전환했다. 해외기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던 다양한 종류의 참치를 섭씨 영하 50도 이하로 냉동 유지되는 독항어선으로 교체 출항시켜 어가가 높은 일본에 직접 판매토록 하였는데 이는 많은 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양질의 참치를 잡기 위해 인도양 해역에서 대서양으로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기도 했다.

다음은 사업 다각화 일환으로 트롤어업을 시작했다. 트롤어업이란 저인망을 사용해 깊은 바닷속의 물고기를 잡는 어업을 말한다. 김재철 회장은 트롤어업이 연승어업보다 어획량과 수익성이 월등히 높을 뿐만 아니라 수산업의 국제화 추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란 걸 간파했던 것이다. 그 당시로는 파격이라 할 수 있는 선내에 공장시설을 갖춘 4500톤급 대형 트롤선(동산호)을 도입하였다.

동산호는 선내에 공장시설을 갖춘 세계적 수준의 대형 어선이었다. 건조비만도 1250만 달러로 당시 동원산업의 전 재산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트롤어선을 도입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북양으로 진출, 대구·명태·가자미와 같이 바다 밑에 사는 저서어(底棲魚)를 대량 어획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장을 확대해 북태평양 캄차카 해역에도 나갔다.

특히 캄차카 지역에서는 3개월 만에 3000톤 만선을 기록했고 그 후에도 계속 조기 만선을 거듭해 수산계의 혹심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미쓰비시상사와 계약한 선가 상환기일을 하루도 어기지 않고 완불함으로써 양국 수산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동산호 건조를 맡았던 미쓰비시상사는 당초 김 회장의 사업계획과 선가 상환계획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불황인 시기에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 대형 공모선 건조는 위험부담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첫째 우리의 인건비가 일본에 비해 싸고, 둘째 동산호가 주로 어획을 할 북양의 주요 어획물인 명태 수요량이 많고, 셋째 선박이 건조되면 자신이 직접 현장에 나가 조업지도를 하겠다는 약속 을 주지시키며 미쓰비시상사를 설득해 나갔다.

결국 미쓰비시상사는 지불보증 없이 김 회장의 서명만으로 동산호 건조에 대한 6년 분할 상환계약을 체결했고, 이로부터 2년 만인 1975년 2월, 동산호가 건조됐다. 이를 계기로 동원산업은 놀랄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불황 속에서도 열성적이고 도전적인 기업 이미지를 분명히 심어 갔다.


국내 최초 헬리콥터 탑재식 선망어선 도입

하지만 4년 후인 1979년, 이란의 원유 수출 중단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78년 배럴당 12달러였던 유가가 1981년 12월 34달러로 치솟았다. 1차 석유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회사를 폐업하거나 적자운영에 시달리는 업체가 속출했다. 게다가 연안 국가들이 200 해리 경제수역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한국 수산업계는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1979년 동원산업 창립 10주년을 맞이한 김 회장은 다시 몰아친 제2차 석유파동의 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헬리콥터 탑재식 참치 선망어법을 개발할 계획을 짰다.

선망어법은 미국에서도 1943년 이래 개발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선망어법에 알맞은 배를 구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배타적이었던 어업선진국들이 쉽게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다.

또한 선망선 1척 값이 300 톤급 참치 독항선 10여 척 값에 해당했기 때문에 대기업에서도 뛰어들기를 주저했다.

김 회장은 선망어업 개발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1979년 1월 국내 최초로 헬리콥터 탑재식 선망어선인 코스타 데 마필호(807톤)를 320만 달러에 도입했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괌에 기지를 설치하고, 파푸아뉴기니아 해역에서 참치선망 어업에 도전했다. “잘못 운영하다가는 어렵게 이룩한 동원이 도산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직접 승선해서 고기 잡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파푸아뉴기니아 근해에서 1회 투망에 250톤(당시 22만 달러)정도의 어획을 올리는 쾌거를 이뤘다. 선망사업 성공에 확신이 선 김 회장은 선망선을 급속도로 늘려 동원산업은 참치 어획에 있어 세계적 회사로 성장해 나갔다.

현재 동원그룹은 운반선 5척, 선망선 15척, 합작선망선 2척, 연승선 16척, 트롤선 1척, 해외자회사 선망선 3척 등 총 42척의 선박을 소유하고 있다.


 

▲ 1980년대 배우 원미경을 모델로 한 동원참치 광고.<동원그룹>

국내 최초 참치통조림 ‘동원참치’ 출시

김 회장은 1982년 원양어업에서 식품가공업으로의 확장을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전까지 원어 형태로 해외에 수출해 오던 참치를 통조림으로 가공해 국내시장에 선보인 것이다. 1차 산업인 원양어업에서 2차 가공산업까지 확대했다.

김 회장은 선진국의 식생활 패턴을 분석하고 제품개발에 대한 계획을 수립한 끝에 참치 통조림을 출시하기로 했다. 참치 통조림은 국민소득 2000달러 이하인 나라에서는 팔리지 않는 선진국형 식품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수산통조림이라 하면, 튜나 캔(Tuna Can)을 떠올릴 만큼 참치 통조림이 보편화돼 있었지만, 국내에는 꽁치 통조림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김 회장은 점차 선진국 형태로 변모해가는 국민들의 식생활 패턴을 감지함과 동시에 ‘1인당 GNP 2000달러 이상인 국가에서는 참치의 대중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착안해 참치통조림 개발 및 출시에 나섰다.

참치통조림은 당시 국내 소비자들에게 생소한 식품이었기에 김 회장은 광고와 시식회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참치 통조림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1984년 추석 명절을 앞두고 참치통조림 선물세트를 업계 최초로 선보였다. 그해 추석에만 30만 세트 이상이 팔리며, 선물세트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참치통조림은 백화점, 대형마트 등에서 명절 선물세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은 참치 통조림으로 안정된 시장을 확보한 뒤 수산물 제조판매부문을 확대하기로 했다. 가공식품의 다양화를 위해 제조공장을 준공하고, 꽁치 통조림·조미김·어육연제품 등을 생산·판매하며 원양어업에서 식품가공업으로의 순조로운 확장을 이뤄나갔다.

참치통조림은 2014년 7월 기준 50억 캔 판매를 돌파했으며 쌀·라면과 함께 주부들 사이에 3대 비상 식품으로 꼽히고 있다.

1999년부터 7년간 무역협회장 임기를 명예롭게 마친 김 회장은 2006년, 다시 동원그룹의 키를 잡았다. 그리고 2008년, 세계 최대 참치 브랜드인 ‘스타키스트’와 3억6300만 달러에 달하는 대형 인수 계약을 체결하며 또 한 번 재계를 놀라게 했다.

스타키스트는 김 회장이 젊은 선장 ‘Captain J. C. Kim’으로 사모아 어장을 누비던 시절, 어획한 참치를 납품하던 회사 중 가장 큰 고객이었다. 1963년 스타키스트는 사모아 섬에 참치통조림 공장을 준공해 미국 내 참치통조림 시장 조성에 힘쓰고 있었다. 당시 사모아 공장의 참치 통조림 제조를 위해 최초로 참치원어를 납품했던 이가 바로 김 회장이었다.

1960년대 초는 미국에서 참치통조림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시기라, 스타키스트는 수요량을 맞추기 위해 많은 양의 참치 원어가 필요했다. 당시 남태평양 어장에서 가장 고기를 잘 잡는 선장으로 유명했던 김 회장은 매번 가장 많은 양의 참치를 스타키스트에 납품하는 뛰어난 선장이었다. 고객사였던 스타키스트에서 김 회장을 위해 파티를 열어줄 정도였다.

김 회장은 20대에 남태평양을 누비며 잡은 참치를 납품하던 미국 거대회사를 50여 년이 지난 후 인수하게 된다. 적자에 허덕이던 스타키스트는 동원그룹 인수 후 경영 안정화와 효율화를 통해 매해 성장을 거듭해 나가고 있다.

김 회장은 1969년 현물차관을 통해 도입한 어선으로 동원산업을 창업한 이후 종합식품가공업·금융업·종합포장재·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왔다. 이를 통해 동원그룹은 현재 연 매출 6조 원을 상회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수산·식품·종합포장재·물류 등 4대 축을 중심으로 글로벌 경영을 가속화하고 있다.

2008년 미국 ‘스타키스트’를 인수했으며, 아프리카 국영기업이었던 ‘S.C.A SA’와 미국의 종합포장재 회사인 ‘탈로파시스템즈’, 베트남 최대 포장재회사인 ‘TTP’‘MVP’를 인수하는 등 세계시장을 향한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최대 물류회사 중 하나인 동부익스프레스를 인수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또 다른 승부, 금융업 진출

국내 원양어업계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진 김 회장은 축적된 자금과 경영능력을 바탕으로 2차·3차 산업 진출을 모색한다. 그가 주목한 분야는 금융업이다. 1981년 2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AMP과정을 이수하던 김 회장은 하버드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이 제조회사가 아닌 증권회사에 더 많이 진출하는 것에 주목했다.

자본주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증권회사가 인기가 있다면, 한국도 앞으로 증권업이 유망산업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는 곧 실행에 옮겨졌다. 1982년 70억원 규모의 한신증권(한국투자증권)을 인수했다. 동원산업이 한신증권을 인수 할 때 절묘한 입찰가 산정이 주효했다.

김 회장은 한신증권의 예상 낙찰가격이 70억 원이었기에 동원산업의 첫 입찰가는 70억5000만원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태평양화학과 미륭건설의 입찰가가 높을 것으로 예상하고 71억 원으로 작성하기로 하고 입찰장에 나갔다.

하지만 입찰 당시 입찰가를 좀 더 높이기 위해 최종적으로 71억2000만원으로 써냈고 이 판단은 적중했다. 입찰결과 태평양화학 71억1750만원, 미륭건설 71억12500만원을 입찰가로 썼고, 동원산업이 약 250만원 차이로 인수에 성공한 것이다.

한신증권을 인수하면서 금융업 진출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잇따라 한신기술개발금융(1986)·한신경제연구소(1986)·한신투자자문(1988)을 설립해 2차 산업과 3차 산업 진출에 들어가는 자금지원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신증권은 1996년 4월 동원증권으로 상호를 바꾸고 자기자본수익률 업계 1위를 차지하는 증권업계의 강자로 자리 잡았다. 1997년에 이어 1998년도 증권감독원 경영평가에서 ‘최우수 증권사’로 선정됐다.

또한 이익공유(Profit sharing) 성격의 원양어업 성과보상제도를 적용해 우리나라 증권업 최초로 인센티브제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이후 김재철 회장의 장남 김남구 부회장이 동원증권을 물려받아 독자경영에 나섰고 한국투자증권까지 인수했다. 한국투자증권은 2011년부터 3년 연속 수익률 1위를 차지하는 국내 대표 증권사로 성장했다.

특히 올해 1분기에는 순이익 1300억 원을 기록, 증권업계 순이익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정도경영과 사회공헌 앞세우는 경영철학

김재철 회장이 1991년 성실한 납세의무 이행으로 본보기가 된 일화는 유명하다. 동원산업의 주식 59만주를 장남 김남구 부회장(한국투자금융지주)에게 이전하면서 62억 원의 증여세를 냈다. 당시까지 자진신고세액으로는 사상 최고기록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양심납세 미담의 주인공으로 신문과 방송에 소개됐는데 언론사에 ‘신문에 난 내용을 믿어도 됩니까’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습니까’라는 독자의 문의가 많았다고 한다.

일부 신문에서는 독자의 높은 관심을 외면할 수 없어 화제성 기사를 사회면 또는 경제면 톱기사로 옮겼다가 다시 1면 머리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재산을 자식에게 넘겨줄 때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는 것은 법이 정한 것이라서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이 일은 기업인의 도덕과 윤리가 문제시되고 정직한 행동이 우매한 것으로 간주되는 당시 풍토에서 큰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일부 재벌들의 비상장 계열사를 통한 재산 대물림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김재철 회장은 기업의 기본 의무인 ‘납세’ 와 ‘일자리 창출’을 통해 국가에 기여하지 못하면 기업의 존재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우리나라 전체가 외환위기로 신음하던 1990년대 후반에도 재계에서 드물게 매년 신입사원을 채용했다.

또한 ‘원칙을 철저히, 작은 것도 소중히, 새로운 것을 과감히’라는 행동규범을 통해 동원그룹 전 임직원에게 작은 일에서부터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정도경영을 일깨우고 있다. 김 회장은 정도경영을 통해 기업이 공정하고 투명한 윤리경영을 구현해야 나라에 보탬이 되고 고객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기업의 당연한 책무라고 믿었다.

김 회장은 동원산업을 창업한 지 10년 뒤인 1979년, 자신의 동원산업 주식 10%를 출연해 교육을 위한 사회공헌재단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했다. 많은 기업가들은 경영활동으로 얻은 이익을 사업 확장에 투자하기 마련이지만, 김 회장은 달랐다.

김 회장 본인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렵게 공부한 기억이 있고, 당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에는 공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았다. 동원육영재단 설립은 이러한 학생들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한 후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선발된 장학생은 현재까지 6000여 명에 달한다. 이준보 법무법인 양헌 대표변호사, 이지환 카이스트 교수, 김정관 한국투자증권 부사장 등 장학생 중 여러 명이 각계에서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또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지원을 시초로 고려대·연세대·전남대·한국외대·부경대·국립수산연구원 등 국내 유수 대학 및 연구기관에 연구비를 지속적으로 지원해오고 있다.

1996년 서울대 동원생활관 건축금 기부, 2005년 부경대 동원학술연구재단, 전남대 동원장학재단 설립, 2007년 한국외대 동원그룹 리더십장학재단 설립, 고려대 글로벌 리더십센터 건축금 기부, 2010년 부경대동원장보고관 건립, 2013년 조선대 장학금 기부 등 교육발전을 위한 기금과 교육기자재를 지원했다.


뚜렷한 철학과 소신 가진 실천적 기업가

김 회장은 다독가로 소문났다. 책 읽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 그는 2007년부터어린이 도서지원 사업인 ‘동원 책꾸러기’를 통해 매달 1만2000여 가정에 동화책을 지원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만 6세 이하 어린이를 키우는 가정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100만 권 넘는 그림책을 무상으로 보내주고 있다. 최근에는 대학생 대상 전인교육 프로그램인 ‘자양라이프아카데미’를 통해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인성·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소양을 갖춘 인재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

김재철 회장은 뚜렷한 철학과 소신을 갖고 살아가는 실천적 경영자다. 기업경영에 있어 어떤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또 국가를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정도경영을 바탕으로 한 그의 철학과 정신은 현 시대의 많은 기업인이 본받아야 할 기업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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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이 말하는 성공하는 리더의 7가지 조건

공병호 박사가 쓴 <김재철 평전>서 밝혀

동원그룹은 지난해 창업자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삶과 경영에 대한 기록을 담은 <김재철 평전, 파도를 헤쳐 온 삶과 사업 이야기>를 발간했다. 이 책은 인간 김재철의 삶과 경영에 대한 기록이자 평가서다.

‘김재철 평전’은 공병호 박사가 1년여 간 공들여  집필했다. 공 박사는 김 회장의 일대기는 물론 기업가 정신과 생활 원칙, 남다른 경영 철학을 분석했다. 추천사를 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김재철 평전은 한 개인이 아니라 처음으로 바다를 발견하고 그 넓은 세계로 뛰어든 한국 현대 산업사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평가했다.

김재철 회장은 책에서 “사장의 그릇만큼 회사가 성장한다”고 말할 만큼 리더의 능력과 열의에 따라 회사가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선장이 어획량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과 같다. 특히 사장의 능력과 열의는 회사 성장의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사장에게는 일반적인 리더들과 다른 특별함이 요구된다. 그래서 김 회장은 성공하는 리더의 7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리더는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대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 모두 포함되며 무엇보다 자신이 이끄는 조직이 어디쯤 있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상황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방심하지 않고 항상 점검해야 한다.

사장은 어선을 이끄는 선장 같은 존재이다. 뛰어난 선장은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배가 전진하면서 현재 위치는 계속 바뀐다. 많은 기업들이 사업 확장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는 것은 리더가 업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업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눈에 보이는 것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찰해야 정확하게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 “경영은 밸런스다”라는 말을 새겨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전부가 아니다. 서로 모순되거나 상반되는 것을 한 바구니 안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사장은 두 가지 사이에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CEO는 관리나 조율에 능숙해야 한다. CEO는 한정된 자원을 잘 활용해서 기대하는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인적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 누가 적임자일까?”를 항상 파악하고 궁리해야 한다. 

셋째, 보상하고 평가하는 일을 잘해야 한다. 사람을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신상필벌이 명확해야 조직에 기강이 서고 제대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좋은 조직이 될 수 있다. 사적인 욕심이 눈을 가리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상을 주어야 할지 또 누구에게 벌을 주어야 할지를 분간하는 일은 쉽다.

넷째, 피하지 말고 맞설 줄 알아야 한다. 경영에서는 현안 과제들이 다른 모습을 하고 파도처럼 계속 밀려온다. 외면하거나 피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해결해가는 자체를 즐기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쉬운 길을 통해서 성장할 수는 없다.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자기 분야는 물론 전반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안목과 시야를 연마해야 한다. CEO는 미래를 전망하고 현재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사장이 회사를 어디로 끌고 가야 할지 확고한 방향과 목표가 서 있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고 앞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넓게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섯째, 직원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야 한다. 직원들의 능력은 사장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회사는 사장의 그릇보다 더 크지 못한다는 말은 진리다. 늘 자신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 자신만의 학습방법을 찾아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선장이 고민한 만큼 어획량이 달라진다’는 말은 선장뿐만 아니라 리더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곱째, 모든 결과에 대해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사장은 말만 그럴듯하게 잘하는 사람이어선 안 된다. 계획부터 집행까지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 헨리 트루먼 박물관에는 그의 행동 철학을 잘 표현한 명패가 있다. 큼직한 집무실 책상 위에 “The BUCK STOP here!(모든 일은 내가 책임을 진다)”라는 명언이 새겨진 명패가 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룰 수 없는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앉은 사람, 바론 리더이며 그런 자세에서 추진력이 나온다.

권호 기자  kwonho37@insight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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