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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8:56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청백리 재상 '오리' 이원익 그레이트 리더십
청백리 재상 '오리' 이원익 그레이트 리더십
  • 박흥순
  • 승인 2017.02.03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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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재상 ‘오리’ 이원익의 진솔한 리더십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국가 위기를 극복한 재상이다. 흔히 ‘오리대감’으로 알려진 이원익은 전시 모범적인 재상이자 청백리의 표본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인조반정•병자호란 등 조선을 어지럽힌 굵직한 사건들을 탁월한 능력과 식견으로 헤쳐나갔지만 다른 위인들에 비해 잘 알려지진 않았다.

경세가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백성과 국민을 잘살게 하는 일인데, 그러려면 다양한 분야의 일을 제대로 알고 관리하고 결정해야 한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한두 가지 쓰임새로 한정된 그릇이어서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경세가가 행정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다면 아전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해박한 지식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학에 대한 나름의 식견을 갖는 것이 바탕이다. 이 점에서 오리 이원익은 전란과 혼돈의 조선을 보듬은 훌륭한 경세가였다.

이원익의 정치 경력에서 의미 있는 출발점은 안주 목사 시기다. 그는 목사로 임명된 다음날 곧바로 말을 타고 안주로 떠났다. 당시엔 임명된 뒤에도 한동안 한양에 머무르며 유력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 사이 현지 아전들이 신임 수령을 모시러 한양에 오면 그들과 함께 부임지로 내려가는 것이 관례였다. 이원익은 안주에서 아전들이 담당하던 전세(田稅) 운반도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전세 수취 및 납부는 지방관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원익의 이런 행동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백성은 마땅히 돌봐야 할 대상”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며, 관속을 대하는 것도 각박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원익은 이런 신념을 토대로 백성을 대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이원익의 입장에서 마땅히 돌봐야 할 대상이었다. 
그가 안주목사로 부임했을 당시 안주는 굶어죽은 사람이 절반에 이를 만큼 참혹했다. 이원익은 부임과 동시에 곡식 1만석을 방출해 기근을 해결했고, 1년 중 3개월이던 군역을 2개월로 줄여 백성들이 생업에 힘쓸 수 있게 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양잠을 적극 권장하며 의식(衣食)생활을 풍족하게 했다. 그때 심은 뽕나무 숲을 백성들은 ‘이공상(李公桑)’이라고 불렀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이원익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중기까지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물자를 각 지방에 할당해 이를 거둬서 충당했다. 각 지방에서는 중앙에서 할당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호세(戶稅)를 부과했는데 이를 공납이라 했다. 이 제도는 권세가와 방납업자들에 의해 엄청난 폐단을 낳았고,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16세기 초 이이와 류성룡 등이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주장한 수미법은 광해군 시기 이원익에 의해 대동법(大同法)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처음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작한 대동법은 1624년 강원도, 1651년 충청도, 1658년 전라도를 거쳐 1708년에는 전국으로 퍼졌다. 
이원익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인조가 “근래에 교화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탓에 풍속이 크게 훼손되어 강상을 범하는 변고가 줄지어 일어나고 백성들의 원망이 갈수록 더하니, 이는 우매한 내 부덕의 소치다. 어찌하면 세도를 되돌려 다시 훌륭한 정사를 펼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이원익은 “만약 수령이 부세 독촉을 늦춤으로써 자신의 영지를 마지막 보루가 되게 하고 백성을 어루만지고 편히 살게 하여 민심을 얻는다면, 백성이 윗사람을 친애하여 목숨도 기꺼이 버릴 것입니다. 백성을 아껴 준 다음에야 국가에 불필요한 낭비가 없어지고 민심을 얻을 수 있으니 이는 성상께서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고한다. 

계급·당파 초월한 인물

선조실록엔 “이원익을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는 말이 기록돼 있다. 이처럼 이원익은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얼핏 류성룡을 더 높여주는 말인 듯하나, 속일 수 있음에도 차마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이 말에서 이원익의 됨됨이에 사람들이 스스로 감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은 말보다 행동을 우선 했고, 원리원칙에 근거한 정론과 확실한 실력으로 승부했다.
솔선수범과 관대함으로 사람을 반성하게 하고 결국 마음으로 굴복시켰다. 이원익은 이 리더십 요소들을 64년 공직생활 내내 지켰다. 권력의 힘이나 위세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감화를 보여준 것이다.

이원익이 백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높은 신망을 받았다는 사례는 인조반정 직후에도 찾을 수 있다. 서인들의 주도로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 명분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임금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백성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서인들이 영의정에 이원익을 추대하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광해군에 이어 인조까지 영의정직에 추대한 것이다. 
광해군과 인조대의 집권세력은 북인과 서인이었지만 이원익은 소수 당파인 남인 출신이었다. 비록 그의 당파색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다른 당파의 추천을 받으면서 40년 넘게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는 점은 그의 인품을 짐작케 한다.

청백리로 소문난 오리대감

이원익은 조선역사를 통틀어 가장 청렴한 공직자 중 한 명이다. 이원익은 죽기 전 ‘절대 후하게 장사 지내지 말라’ ‘그릇된 재화를 멀리하고 농사에 힘써라’ ‘나에게 부끄러움을 남기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다. 때문에 그에게는 언제나 부정과 뇌물이 접근할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모신 임금인 인조는 “내가 평생 그를 존경하는 까닭은 그의 공로와 덕행만이 아니다. 그의 청렴함을 모두가 본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의 근심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조실록의 졸기(卒記)에 이원익은 ‘사람됨이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깨끗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치적(治績)이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졌다. 상(上·인조)이 반정하고 나서 맨 먼저 그를 천거해 재상으로 삼고 매우 신임했다. 연로했으므로 궤장(几杖)을 하사해 편안하게 했고, 또 흰 요와 흰 옷을 하사해 그의 검소함을 표창했다. 관서(關西)에 두 번 부임했는데 그곳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했다. 그가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오늘날 서울시 금천구 일대)으로 돌아갔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네 명의 임금을 모시며,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면서 두어 칸의 초가집에서 청빈한 삶을 살아간 이원익. 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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