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과 독일기업의 경영비법
이병철과 독일기업의 경영비법
  • 민석기 기자
  • 승인 2016.11.0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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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이익에 눈멀지 말라 -지멘스와 신라호텔

신라호텔을 설립한 이는 호암이다. 그는 왜 신라호텔을 세웠을까? 
결정적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얼굴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 정부는 삼성에 호텔 사업 진출을 주문했다. 급격한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얼굴이라고 내세울 만한 대표적 호텔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호암은 정부의 방침에 동의했고 호텔 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1974년)으로 인해 한·일 관계까지 급속히 냉각되면서 합작을 했던 일본회사들의 자본금 불입이 중단됐다. 호텔건립사업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호암은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1979년 신라호텔을 개관, 영업에 들어갔다. 
개관 직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2차 오일쇼크가 닥쳤고 10·26사태가 일어나면서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적자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신라호텔은 개업 초부터 ‘팁 안 받기’ 제도를 비롯해 품질 위주의 영업정책을 철저히 지켜나갔다.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최고의 가치를 버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83년 신라호텔은 흑자로 돌아섰고 1987년엔 미국의 금융전문지가 선정하는 세계 베스트호텔 중 31위에 올랐다. 국내 호텔 중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호암은 인생의 마지막 도전에서도 그랬다. 

김군, 니는 적자 걱정 말고 개발에만 매진해라

호암은 1983년 도쿄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엄청나게 몰입했다.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반도체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회의에는 과장급 직원까지 참석했다. 전사적인 총력전 체제를 가동한 것이다. 이 회장은 공장에도 수시로 내려가 현황을 점검했다. 기업가 생애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해 12월12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64K 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2~3년 차이로 좁힐 수 있게 됐습니다.” 
국가적 쾌거였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삼성의 엄청난 반도체 개발 속도에 충격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존의 낡은 부천공장 생산라인을 활용해 VLSI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삼성은 그 후 불과 10개월 만인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어 1986년 7월에는 1메가 D램을 개발, 한국 반도체 산업을 ‘메가 시대’에 진입시켰다. 마침내 1987년에는 세계 반도체 업계 톱 10(9위)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
이처럼 반도체 사업은 빛나는 성과를 이어갔지만 적자에서는 좀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10위 안에 우뚝 선 1987년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13년 연속 적자였다. 적자 규모도 상당히 컸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당시 세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에 매달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그럼에도 호암은 조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실적이 부진하면 임직원들을 닦달할 법도 한데, 호암은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독려했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회장님은 언젠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도체사업본부장 아이가! 김군, 니는 적자 걱정 말고 기술자 양성과 신기술·신제품 개발에만 매진해라. 내가 책임질 테니.’ 
저는 그 말씀 한마디가 오늘의 반도체 신화를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두가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됐으니까요. 평소 회장님은 적자에 대해 엄격했지만 유독 반도체 사업만큼은 달랐습니다.” 
호암이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7년 8월 기흥 반도체 공장 3라인 기공식이 마지막이었다. 기흥 3라인은 이듬해 준공식을 갖자마자 바로 풀가동에 들어갔다. 1988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첫 흑자를 냈다. 흑자 규모는 그 동안의 누적 적자를 모두 만회하고도 남았다. 
호암은 생애 마지막 사업에서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아니, 애당초 단기적인 이익을 욕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삼성의 미래, 나아가 국가 경제의 앞날을 열어갈 든든한 열쇠 꾸러미를 남기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지멘스의 ‘선택과 집중’ 전략 호암철학과 일맥상통

호암처럼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내다 본 독일 기업가는 ‘지멘스(Siemens)’ 창업자인 베르너 폰 지멘스와 그의 후손들이다. 베르너 폰 지멘스는 세계 전기산업 발전의 토대를 만든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기업가로서는 “순간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팔지 않겠다”는 경영철학을 통해 큰 족적을 남겼다. 단기적인 이윤보다는 기술개발에 주력했고,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의 경영이념이었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장기적인 성장의 선결과제로 꼽는 연구개발(R&D) 투자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실천한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기업들이 많은 독일에서도 지멘스 가문은 특출난 경영자를 많이 배출한 가족기업으로 유명하다. 창업자부터 남달랐다. 베르너 폰 지멘스는 1816년 독일 하노버 인근 렌테(Lenthe) 지역의 가난한 농가에서 10명의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가난 탓에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가 선택한 길은 군대였다. 포병학교 사관후보생이 된 베르너는 탄도학·수학·물리학 등의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1846년 베르너는 장거리 무선전신에 쓰일 수 있는 다이얼 전신기를 발명한다. 청년 장교는 이 발명을 계기로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다. 1847년 베르너는 기계공인 게오르그 할스케와 동업해 ‘지멘스-할스케 전신 건설회사’를 세웠다. 
이후 지멘스의 사업을 확장한 것은 창업자의 두 동생 빌헬름과 칼이었다. 빌헬름은 지금도 강철을 만드는 데 쓰이는 ‘평로법’을 개발해 지멘스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평로법 기술이 에펠탑과 철도 레일도 탄생시킨 것이다. 
칼은 러시아 전신망 사업을 수주하는 등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지멘스를 확장했다. 지멘스는 그러나 독일의 1차 세계대전 패배로 위기를 맞는다. 독일이 패전하면서 지멘스-할스케사는 영국과 러시아 등 해외 자산을 대부분 몰수당했다. 
위기의 순간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창업주 베르너 폰 지멘스가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얻은 아들 ‘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였다. 1차대전으로 지멘스는 자기자본의 40%가량을 잃었으며 해외 자산의 대부분과 특허권도 상실했다. 손에 든 것이 거의 없었던 칼 프리드리히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지멘스라는 배를 다시금 세계적인 전자기업으로 키워내야 했기 때문. 스스로를 ‘폭풍우 속의 선장’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는 날서린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모든 사업부문을 ‘지멘스-할스케’사와 ‘지멘스-슈커트’사라는 두 개의 지주회사 체제로 정비했다. 여기에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를 통한 지멘스 가족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다지며 지멘스를 성장궤도로 복귀시켰다. 
1927년 독일 국가철도회사의 경영이사회 의장을 맡았으며 1931년에는 독일 전기기술협회의 초대 의장을 맡기도 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의 등장은 지멘스에 또 다른 위기를 불러 왔다. 칼 프리드리히는 “급진적인 나치가 세력을 키우면 키울수록 독일 경제는 위기에 맞닥뜨릴 것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지멘스는 전쟁물자 공급에 나서야 했다. 민간용 제품 생산이 전면 금지됐고 전쟁물자 생산만 가능했다. 전쟁 기간 연합군의 폭격과 이에 따른 피해는 심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후 지멘스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연합군은 대기업의 지원이 있었기에 나치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판단해 지멘스를 비롯한 독일의 주요 대기업들을 해체하려고 했다. 칼 프리드리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합군측을 설득하며 그룹 해체를 막기 위해 나섰다. 결국 지멘스 해체계획은 1951년 철회됐다. 
칼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은 아들 에른스트 폰 지멘스가 지멘스를 맡아 ‘3세 경영’을 시작한 1966년 이후 현 지배구조의 골격을 갖게 됐다. 독일 정부가 대기업 집단에 속하는 회사들 간의 결합규제를 이전보다 강화하도록 증권법을 개정하면서 지멘스의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떠올랐다. 

당시 지멘스 가문은 ‘지멘스-할스케’, ‘지멘스-슈커트’, ‘지멘스-라이니거’ 등 세 개의 지주회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세 지주회사의 공동 감독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던 에른스트 폰 지멘스는 지주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해 그룹 형태로 지멘스를 재조직했다. 이어 유능한 전문 경영인들을 등용해 회사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탈바꿈시켰다. 1971년 에른스트의 뒤를 이어 감독이사회 의장을 맡은 4세대 피터 폰 지멘스도 1981년 의장직을 내놓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지멘스 가문의 명맥이 끊긴 건 아니다. 피터 폰 지멘스의 조카이자 동명이인인 피터 폰 지멘스가 1981년부터 5세대 가족의 자격으로 감독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지멘스의 지배구조는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라는 이원화한 체제로 구성돼 있다. 실질적인 경영활동은 경영이사회가 맡고, 감독이사회는 경영이사회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감독이사회는 주주총회에서 선출한 10명과 노조를 대표하는 10명 등 총 20명으로 이뤄진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현재 지멘스 가문의 보유 지분은 5.5%로 최대주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0명에 달하는 지멘스 가족들이 나눠 보유하고 있는 이 지분은 현재 ‘지멘스 VSV’라는 신탁회사를 통해 위탁 관리되고 있다. 
16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지멘스는 산업재, 에너지, 의료, 인프라 등 4개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분야를 거느리고 있으며, 전 세계 190여 개국에 진출해 약 40만5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2010년 매출은 785억7000만 유로를 기록했다. 
복합기업인 지멘스는 2011년 들어 도시 인프라 사업을 추가해 화려한 변신에 나섰다. 초고속 도시기차 운영, 기술구축, 에너지 분배(배전) 등 도시 인프라 및 서비스 업무를 맡을 사업부 ‘인프라&시티’를 설립한 것. 
인프라 사업부는 165억유로(약 25조원) 규모의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회사측은 예상하고 있다. 로셔 CEO는 “지멘스가 전차, 기술개발, 정수처리 등 도시 인프라에 대한 공공 부문이 매년 5%씩 성장해 오는 2015년까지 1000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잘 알려진 것처럼 지멘스는 보청기부터 승강기, 철도차량, 빌딩 자동화, 송·배전 설비, 플랜트 건설 등 수많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강력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핵심 비즈니스를 에너지와 산업 자동화, 헬스케어 중심으로 개편하며 더욱 성장하고 있다. 오래도록 눈앞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팔지 않고, 최고를 버리지 않은 경영철학을 지켜온 결과다. 이는 호암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호암은 1976년 4월 대기업은 때론 목전의 이익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에는 기업에 따르는 `사회적 책무‘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은 기업은 자기 기업만을 살리는 데 힘을 쏟기만 해도 되지만, 큰 기업주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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