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과 독일기업의 경영비법
이병철과 독일기업의 경영비법
  • 민석기 기자
  • 승인 2016.10.04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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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발상의 창조성으로 난관을 뚫다

호암과 아디다스2009년 9월 17일의 일이다. 양사(아디다스와 푸마) 대표는 아디다스 본사가 위치한 독일 남부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서 굳게 악수를 나눴다.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그 이유는? 무려 60년 만에 앙금을 털어내고 화해했기 때문이다. 

아디다스와 푸마의 전신은 ‘게브뤼더 다슬러’다. 구두 장인들의 고장으로 유명한 헤르초게나우라흐에서 아디와 루디 다슬러 형제가 1920년‘모든 운동선수에게 최고의 운동화를 만들어주겠다’는 결심으로 창업한 회사다. 이 게브뤼더 다슬러란 회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미국의 전설적 스프린터였던 제시 오언스가 신었던 스포츠화를 제조해 세계적인 회사로 도약했다. 하지만 형인 루디가 아디와의 반목으로 1948년 강 건너에 푸마를 창업하면서 회사는 갈라지고 말았다. 그때 아디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디다스로 새 출발을 했다. 
100년에 가까운 아디다스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려운 때일수록 마케팅에 투자해야 한다’는 창업자 아디 다슬러의 도발적 마케팅 지론에 있었다. 그는 제품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당시로선 파격이나 다름없는 스타플레이어 마케팅을 기획했다. 1936년 올림픽 때 제시 오언스가 큰일을 낼 것으로 예상한 아디는 직접 차를 몰고 선수촌까지 찾아가 손수 만든 육상화를 오언스에게 건넸다. 오언스는 이 신발을 신고 육상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고 이때부터 세계 각지에서 아디다스에 대한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디다스의 명성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디다스는 지금도 여전히 스포츠 마케팅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고의 운동팀, 운동선수와 스폰서 계약을 맺거나 FIFA 월드컵과 올림픽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공식 후원사가 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다. 경제상황이 어려워도 마찬가지다. 어려울수록 마케팅 투자를 더 중시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2008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로 전세계 경기가 바짝 얼어붙었던 2009년에도 마케팅 예산을 거의 줄이지 않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기업은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마케팅 비용을 줄인다. 소비가 위축되면 마케팅 효과도 줄어든다는 것이‘경영학의 일반론’인데 아디다스는 거꾸로 가는 셈이다. 하지만 훌륭한 제품 없이는 마케팅도 될 리가 없다. 창업자 아디 다슬러는 마케팅을 강조하기 이전에 제품혁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했고 실천하는 데 성공했다. 아디 다슬러가 모든 운동선수에게 최고의 운동화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끝에 무려 762개의 특허권을 보유한 것이 단적인 예다. 
아디 다슬러는 매일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 선수들이 더 좋은 성적을 내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욕망이 매우 강했다. 그는 1925년에 이미 접지력을 높이기 위해 운동화에 스파이크를 박는 파격을 선보였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그가 만든 스파이크화를 신고 출전한 독일 육상선수 리나 라트케는 여자 800미터 경기에서 2분 16초 대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서독팀에게는 잔디 상태에 따라 스파이크 길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 ‘스크루인 스터드(screw-in studs)’축구화를 제공했다. 이 신발을 신은 서독팀은 3년간 국제경기 32전 무패를 기록한 당대 최강 헝가리를 3대 2로 격파하며‘베른의 기적’을 쓰게 했다. 이 경기는 아디다스가 축구화의 지존으로 자리매김한 계기가 됐다. 1964년에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135그램의 운동화‘도쿄64’를 선보이고,‘수영복은 작을수록 좋다’는 편견을 깨고 전신 수영복을 최초로 개발하기도 했다. 아디다스가 말하는 혁신은 단순한 색상 변경이 아니다. 혁신은 말 그대로‘전혀 새롭고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는 제품’을 말한다. 
아디다스의 2010년 전체 매출은 120억 유로를 기록했다. 그중 축구 부문에서 올린 매출은 15억 유로(2조 3,700억원)로 2008년의 사상 최대 매출 기록(13억 유로)을 가볍게 넘어섰다. 아디다스는 1989년 다슬러 가문의 갑작스러운 내분으로 1993년 프랑스 기업가 두 사람(로베르 루이드레퓌스, 크리스티앙 투르)에게 매각됐으나, 지금도 아디 다슬러의 경영철학을 유지하고 있다. 시대의 기존 사고를 뛰어넘은 아디 다슬러의 ‘역발상적 결단’은 호암의 조선산업 진출 과정과 판박이다. 
1970년대 초반의 한국은 겨우 1〜2톤 정도의 철선을 만들어 본 경험이 전부였다. 당시 일본을 비롯해 미국, 유럽 등 어느 나라도 호암이 현대적인 선박을 건조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호암은 조선산업이 ‘노동집약형’이라는 점에서 성공 가능성을 엿봤다. 일본이 유럽보다 저렴한 임금을 앞세워 조선산업의 붐을 누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호암은 일본의 조선산업은 한국의 밝은 내일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드디어 1972년 비서실에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대폭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1973년 3월 조선소 건설 후보지 물색작업에 들어간 호암은 그해 5월 일본 조선업계의 명문 IHI(이시가와지마하리마 중공업)의 다구치 회장을 찾아가서 한국 조선산업의 가능성을 타진한 후 그해 11월 역사적인 조선 출범의 닻을 올렸다. 
호암과 아디 다슬러는 기업 환경과 사업 특성에 맞게 혼신의 힘을 기울인 덕에 오늘날 최고의 기업을 창조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호암은 직접 기획해 만든 골프장의 나무 한 그루, 화초 한 포기의 배치에도 모든 정성을 쏟았다. 작은 것에서부터 최선을 다해야 최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최고가 될 자신이 없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최고를 향한 노력, 명품을 향한 호암의 끊임없는 열정이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1968년에 호암은 오늘날까지 국내 최고 명문 골프장으로 손꼽히는 안양골프장을 개장했다. 몇십 년 후를 내다보고 명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안양골프장 건설에 앞서 일본의 500컨트리클럽 등 명문 골프장을 다 돌아보고 서구의 유명 골프장에 관한 책을 두루 읽으면서 수십 년 후에도 국내 최고의 명성을 이어갈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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