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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8 17:47 (목) 기사제보 구독신청
정주영 리더십 특강
정주영 리더십 특강
  • 김문현 전문위원
  • 승인 2016.05.31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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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 낼 수가 있다!
▲ A&P 애플도어社의 롱바톰(Longbattom) 회장의 주선으로 정주영은 영국의 바클레이즈 은행으로부터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는데 성공한다. 사진은 롱바톰 회장(맨 오른쪽)과 업무 협의를 하는 모습.

조선업 위기의 지혜, 아산에게 묻다 

바야흐로 조선업이 위기다. 자구안 제출이니 인력 구조조정이니 하는 단어들이 횡행하고, 수주절벽에 조단위 적자, 강성 노조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시계 제로의 항로를 헤쳐 나가고 있다. 

40여년 전 정주영 회장이 어떻게 이 땅에 조선업의 뿌리를 내렸고 그 험난한 파고를 어떻게 헤쳐 왔는가를 돌이켜 보며, 오늘날 조선업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지혜 또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1970년대 초,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방침에 따라 이미 시작된 포항제철에서 생산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 줄 사업이 필요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미 1960년대 일본의 조선소들을 견학하면서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조선소를 짓겠다는 꿈을 꾸어왔던지라 정부의 권유에 못이긴 척 해보겠노라고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정주영 회장은 철판으로 만든 큰 덩치의 탱크가 바다에 떠서 동력으로 달리는 것이 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기에 조선업 자체를 무모한 사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1만7천톤급 이상의 배를 지어보지 못한 나라에서 30만톤급 배를 짓겠다고 덤벼든 정주영. 당시 태완선 부총리는 “조선소, 그거 어디 되겠습니까? 될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발언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호된 질책을 받는다. 사진은 현대조선소 건설 계획을 직접 브리핑하는 모습.

“어떤 실수 보다 치명적인 실수는 일을 포기해 버리는 것”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조선소 건설에 소요될 8천만불의 차관을 얻기 위해 미국과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교섭을 벌였는데 냉소적인 반응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당시 한국이 만들었던 최대 규모의 배는 1만7천톤급이었는데 30만톤급 배를 만들겠다는 구상부터가 허황되게 들렸을 것이다. 막상 차관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기술과 자원을 갖고 있다 한들 조선소의 꿈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건설을 포기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어떤 실수 보다 치명적인 실수는 일을 포기해 버리는 것.” 정주영 회장은 다시 한번 배수의 진을 치고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금융브로커 데이비스의 주선으로 A&P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을 소개받게 된다. 롱바톰 회장을 설득하여 추천서를 받게 되면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는 것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아직 선주도 나타나지 않고 한국의 상환능력과 잠재력도 의심스럽다”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때 정주영 회장은 호주머니에서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당신네 영국이 목선을 만들어 세계를 호령하던 것이 1800년대인데, 우리 한국은 그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다.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의 능력과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우리의 잠재력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다”고 강변하며 롱바톰 회장을 설득시킨다. 
정주영 회장의 논리적인 설명과 배포에 감화된 롱바톰 회장이 버클레이즈 은행 총재 앞으로 추천서를 써 줌으로써 차관은 손쉽게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바클레이즈 은행 측에선 “당신들은 그렇게 큰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고 기술자도 없어서 안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프랑스와 스위스 은행에서도 같은 이유로 차관을 거절당했던 터였기에 정주영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정주영의 끈질긴 설득에 바클레이즈 은행은 주한 영국 대사관을 통해 우리나라의 대한조선공사에 조회를 요구한다. “한국의 ‘현대’라는 회사가 30만톤급 배를 건조할 능력이 됩니까?” 이에 대한조선공사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내온다. 그러나 쉽게 물러설 정주영이 아니었다. 

▲ 1950년 현대건설, 1967년 현대자동차, 1973년 현대중공업, 1983년 현대전자 등 정주영은 대한민국의 굵직굵직한 기업들을 손수 창업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59세인 1973년 조선소 창업의 꿈을 이루고 첫 시업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나는 절대로 가능하다…반드시 해내겠다”

“만약에 대한조선공사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이 먼저 와서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 온 것이고,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여기 온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능한가라고 물었으니 불가능이라는 답변이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 낼 수가 있다. 나는 절대로 가능하다. 반드시 해내겠다. 서류 검토를 다시 한번 해 달라”
정주영 회장의 말에 바클레이즈 은행 측은 고개를 끄덕였고 차관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또 있었다. 영국 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 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에 상환불능상태가 되더라도 은행의 손해가 아니라 보증을 선 영국정부의 손해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ECGD 총재는 “당신네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차관을 승인할 수 없다”는 영국정부의 강한 입장을 표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백사장 사진과 유조선 도면을 들고 차관을 얻겠다는 사람이나 차관을 주겠다는 은행이나 그에겐 모두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라한 백사장 사진과 26만톤급 유조선 도면을 보고 선뜻 발주를 해 줄 미친 선주를 어디서 만난단 말인가?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그리스의 리바노스 2세가 전세계에서 배를 가장 싸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다. 정주영 회장은 누구든 배를 발주만 해주면 되는 상황이었고, 리바노스는 정해진 기일 내에 싸게 배를 지어주기만 하면 좋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배포가 맞아 떨어져 스위스에 있는 리바노스의 별장에서 유조선 2척에 대한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 발주증명서를 갖고 영국정부에서 무려 4500만불이라는 당시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50%가 넘는 엄청난 차관이 국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세계 조선 역사 상 유례없이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건조하는 신화를 창조하며 정주영은 조선소의 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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