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리더십 특강
정주영 리더십 특강
  • 김문현 전문위원
  • 승인 2016.05.02 14: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일의 물꼬 튼 시대의 거인

세기의 석학, 기 소르망은 峨山(아산) 정주영의 ‘소떼 방북’을 일컬어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며 극찬한 바 있다. 

▲ 1998년 정주영은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한 방북을 실현시킨다. 사진은 통일의 관문을 통과하는 소떼 방북 차량 행렬

반세기가 넘도록 갈등과 분단의 상징으로 남아 있던 휴전선을 허물고 정확히 ‘1001 마리’의 소떼를 직접 몰고 북으로 향하는 정주영의 모습은 한편의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소떼 방북의 결과물인 금강산 관광은 1998년부터 10년 가까이 이어져 오다가 2008년 관광객 피살사건을 계기로 9년 째 중단되고 있고, 연초에 있은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여파로 2003년 문을 연 개성공단마저 완전 중단의 위기를 맞고 있다. 

마지막 투혼 불살랐던 ‘만수 오빠’였더라면…

어떻게 만들어낸 성과물인데 이렇듯 맥 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남북관계의 소도이며 허파 역할을 해 왔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중단되면서 남북관계는 실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의 소원이자 대업인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간 경제교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정주영 회장이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대북사업! 지금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과연 이러한 지경까지 왔을까? 

‘만수 오빠’라는 별명을 가진 정주영 회장은 남북관계의 위기상황을 보다 지혜롭게 풀어 나가지 않았을까? 요즘 젊은이들이 정주영 회장을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1순위(65%)로 꼽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연유일 것이다. 

▲ 1998년 6월 16일, 분단 반세기 만에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한 방북을 실현시킨 정주영의 소떼 차량 행렬

“시련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 정주영은 김영삼 정권 5년 동안 혹독한 시련에 직면한 바 있다. 그러나 시련이 닥칠수록 그 시련을 지렛대 삼아 늘 새로운 도약을 꿈 꿔왔던 정주영 회장은 “시련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며 반전을 시도한다. 
김영삼 정권 5년 내내 아산 정주영을 우리 안에 갇힌 호랑이 신세가 되었다며 모두들 처량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지만, 정작 정주영 회장은 그 5년을 와신상담의 기회로 삼고 김영삼 정권이 끝나자마자 큰 포효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운동화 한 켤례가 남는다 해도 대북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겠다”

1998년 1월, 현대그룹이 주관하는 주한 외국인 신년하례식 행사장에서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마지막 숙원사업으로 “운동화 한 켤례가 남는다 해도 대북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힌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정주영 회장은 1001마리의 소떼를 몰고 반세기 동안 닫혀 있었던 북한의 빗장을 활짝 열어 젖힌다.
‘정주영의 방북’은 IMF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대치상태를 지속했던 남북 관계를 민간 차원의 경제협력으로 풀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1차 방북에서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 추진 등에 전격 합의한 뒤, 2차 방북 직후 금강산 관광이 본격 시작돼 1998년 11월 18일 ‘금강호’가 역사적인 첫 출항을 하게 된다. 

대북사업, 경제논리 보다 통일 겨냥한 거인의 포석

금강산 관광은 남과 북이 서로 물꼬를 튼 최초의 행사였으며 이 관광 사업으로 인해 남과 북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정주영 회장은 금강산 관광 사업을 통해 우리 국민에게 통일에 대한 희망과 함께 남북이 처한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북한의 2천만 실업자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학습시킴으로써, 통일의 밑거름을 놓자”는 원대한  꿈을 차분하게 실현시켜 나갔다.
북한은 남한 사람들이 대거 밀려오자 금강산에 고정적으로 배치했던 환경미화원을 수시로 교체했다. 남쪽 사람들을 자주 만나 동화되는 것을 우려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환영할 일이었다. 될 수 있는 한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남한의 잘 사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것 또한 남북간 동질감을 회복하고 통일의 초석이 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주영의 대북사업은 경제논리에 기반을 두었다기보다는 통일을 염두에 둔 거인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 1998년 1월, 정주영은 “운동화 한 켤례가 남는다 해도 남북경협에 혼신의 힘을 쏟겠다”며 통일한국을 향한 의지를 불태운다. 사진은 1989년 1월 23일자 평양 도착 기사와 평양에서 허담을 만나는 정주영

“동북아는 5국 체제가 되어야 한다!”

일찌감치 정주영 회장은 1989년 1월 북한의 초청으로 방북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를 맺으면서 남북교류의 첫발을 내디뎠다. 정치 기류가 급변하면서 ‘금강산 공동개발 의정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남북통일을 향한 그의 열망은 식지 않고 10년 후에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경제가 제일 먼저 남북의 통로를 만들고, 거기에 사회, 문화 등이 뒤 따라가고, 맨 나중에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한이나 북한 어느 쪽도 통일을 못한 채 허점을 보이면 밖의 네 나라가 경쟁적으로 달려들게 되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5국 체제가 되어야 한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통일한국 이렇게 다섯 나라가 어깨를 나란히 해야 지역 정치도 안정되고 특히 동북아의 경제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기관차가 될 수 있다”며 통일한국의 확고한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 2003년 6월 30일, 개성공업지구 건설 착공식 현장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말이 있다. ‘공통점을 구하고 차이점은 놔둔다’는 것으로,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협상 전술이다. 이 전략은 1955년 당시 중국 부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유래했다. ‘큰 틀에서 상대방도 나와 같은 생각이니 지엽적인 문제는 뒤로 하고 공통점을 찾아 먼저 진행하자’는 이 말은 그 뒤로 중국 외교 제1원칙으로 준수되고 있다. 광복 70주년이 지난 작금의 남북관계는 정치, 사회, 문화적 간극이 좁혀지기는 커녕 갈수록 현격히 벌어지고 있다. 
북한의 2천만 실업자에게 자본주의를 학습시키고 실천 가능한 경제교류부터 먼저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통일의 초석을 놓겠다는 정주영 회장의 통찰과 시도는 ‘구동존이’의 지혜를 남북 현실에 적용시킨 최초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