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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촌’ 일군 우런바오
‘천하제일촌’ 일군 우런바오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6.05.02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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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월급을 가져가지 않으며, 가장 많은 배당금을 받지 않으며, 가장 좋은 집에 살지 않는다”

‘천하제일촌(天下第一村) 화시(華西)촌’. 화시촌 사람들은 자기 마을을 천하제일이라 부른다. 중국 상하이 푸동공항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화시촌은 인구 5만의 작은 마을이다. 행정구역은 ‘촌’이지만 마을은 이미 도시와 다름없다. 마을은 왕복 4차선의 도로를 중심으로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단독주택이 즐비한 풍경은 미국의 어느 전원도시를 방불케 한다. 
화시촌은 원래 창장(長江) 하류의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화시촌이 독립적인 단위로 형성된 1961년 당시 인구는 667명, 1인당 연간 수입은 53위안(약 9500원), 마을의 자산은 2만5000위안, 마을 공동 채무는 1만5000위안으로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자동차는 커녕 마을 전체에 자전거 한 대 없을 정도의 ‘빈촌’이었다. 하지만 혁신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는 생각을 지닌 한 젊은이 우런바오(吳仁寶/ 1928~2013)가 마을 서기가 되면서 화시촌은 급변했다.

화시촌은 197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개혁・개방을 부르짖은 이래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꼽힌다. 화시그룹으로 불리는 이 마을의 향진(鄕鎭)기업은 2013년 자산 201억 위안(약 3조5200억원)을 기록했고, 중국 선전증시에 상장된 첫 번째 자치단체가 됐다. 중국의 연간 1인당 국민소득이 2천달러를 맴돌고 있을 때 이 마을 거주민들의 가구별 평균 자산은 15만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농민공이라도 평균 임금이 중국 웬만한 도시보다 높고, 많은 사람이 집을 싸게 분배 받고 교육・의료・양로 등 각종 무상 복지혜택이 상당하다.

화시촌이 이렇게 잘 살게 된 데는 ‘노서기(老書記)’ 우런바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화시에서 태어나 화시에서 성장하고 화시에서 운명했다. 일평생 화시촌에서 마을과 촌민들을 위해 헌신한 우런바오는 남다른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황무지에 방향을 제시하다

“어떠한 조건을 가지고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발전을 추구하고 창조하는 것이 도리다”

문화대혁명의 서슬이 퍼렇던 1969년. 그는 비밀리에 촌민들을 모아 마을에 작은 변화를 꾀했다. 촌민들이 농부로서는 결코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런바오는 촌민들끼리 2000위안씩 갹출해 공장을 설립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촌민들은 이에 동의했다. 소규모였지만 철강, 기계산업, 식량가공 공장 등을 설립하면서 0.6마일(1㎢)의 황무지에 지나지 않았던 마을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추종자’로 몰려 성(省) 단위 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등 박해도 받았지만 우런바오는 “촌민들이 부유하고 행복해지는 게 중요하다”며 지하공장의 운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지도자들이 마을을 방문하면 직원들을 전원 들판으로 나가 일하게 하면서 감시를 피했다. 
우런바오의 우직함은 3년 만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명이 일군 공장의 매출액이 전 촌민의 농업생산량에 버금가는 기적을 만들었다. 1970년대 말 중국이 공식적으로 개인기업과 사기업을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화시촌은 순풍에 돛 단 듯 승승장구했다.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우위를 점한 화시촌은 ‘전국 모범 농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화시그룹은 강철, 직물, 관광 등 60여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또 주변의 빈곤한 지역을 합병하면서 마을 규모는 6배가 넘게 성장했고, 연간 약 200만 명의 사람들이 화시촌을 방문하고 있다.

작은 권력에 도취하지 않는다

“권위(權威)에서 권(權)이란 무엇인가? 청렴결백한 것이다. 위(威)는 무엇인가?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간부라면 권위가 있어야 한다. 청렴결백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런바오는 항상 여타 지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작은 권력에 도취하지 않았으며 진심으로 화시촌을 아꼈다. “내 생명이 있는 한 인민을 위한 일을 쉬지는 않을 것이다”라 외치던 그는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촌민들과 직접 호흡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등 현장을 누비는 리더의 모습을 보였다.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고, 저녁 늦게 귀가했다. 공장, 논밭, 논두렁 등 장소를 불문하고 온갖 크고 작은 회의를 주최하면서 화시촌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여기에 ‘가장 많은 월급을 가져가지 않으며, 가장 많은 배당금을 받지 않으며, 가장 좋은 집에 살지 않는다’는 자신과의 세 가지 약속을 지키며 모범이 되기 위해 애썼다. 공산당원으로서 권력에 욕심이 있었다면 그는 화시촌을 떠나 대도시나 다른 지방에서 고위직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 머물렀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청렴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행동에 마을 촌민들은 ‘화시촌 정신’이라는 단결력으로 응답했다. 촌민들은 지금도 주식 배당금의 95%와 성과급의 80%를 촌에 반납한다. 더 많은 이익 창출로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리더의 작은 노력이 공동체에 의미 있는 선순환 바람을 불러온 것이다.

급변하는 정세를 읽어라

“수십 년을 회고해 보면 나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진 것 같다. 하나는 어려움을 관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객일치의 결합력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복잡한 정세를 잘 헤쳐 나가는 것이다”

우런바오가 화시촌을 이끌 무렵의 중국은 불안한 정국이 계속됐다. 사회주의라는 굴레에 갇힌 대륙은 이따금 그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터넷도 없고 정보도 제한적이던 시절이었지만 우런바오는 정세를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촌민들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랐다.
개혁・개방을 이어오던 중국은 1990년대 초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국가주석이던 덩샤오핑은 심천, 하문 등으로 경제시찰을 나갔다.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벌인 것이다.
우런바오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내용을 듣고 건설 경기가 붐을 일으킬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당 간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우런바오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의 큰 뜻은 중국 경제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실행은 머지않아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하고 무언가 일을 벌여야 한다. 일을 벌이려면 돈이 필요하니 어디서든 돈을 빌려오라.”
우런바오는 간부들에게 돈을 빌려오라고 명령을 내린 후, 빌린 자금으로 알루미늄을 수만 톤 매입했다. 우런바오의 예측이 현실로 일어나기까지는 불과 1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중국에는 건설 붐이 일어났고 알루미늄은 품귀현상을 빚었다. 다른 지도자들이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정신의 내용을 학습하고 분석할 때 우런바오는 한 발 앞서 경제방향의 길을 읽은 것이다. 이로인해 화시촌은 집집마다 전화, 컬러TV, 에어컨, 자동차, 별장을 가질 수 있는 천하제일촌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었다. 

변화를 이끌어라

“어려움을 견뎌내고, 교만함을 갖지 말고, 변화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새로운 것에는 항상 많은 사람의 의혹과 질투, 비평이 따르게 마련이다. 반대와 비평하는 사람의 설득도 새로운 일을 하는 것만큼 힘든 과정이다”

젊은 우런바오가 화시촌에 처음 변화의 기운을 불어넣던 당시, 촌민들은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우런바오는 마을에 큰 멧돌을 사와서 방앗간을 세웠다. 처음에는 방앗간을 세울 장소가 없어 지게로 돌과 기와를 나르고 삽으로 땅을 다진 후 방앗간을 지었다. 때문에 촌민들의 원성은 대단했다. “지금도 충분히 곡식을 도정할 수 있는데 굳이 이런 거추장스러운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냐”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우런바오는 그런 사람들에게 “결과가 좋지 않으면 책임을 지겠다”며 그들을 설득했다. 이윽고 완공된 방앗간은 쌀을 빨리, 더 많이 도정할 수 있게 했다. 이웃마을에도 화시촌의 멧돌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일정금액의 도정료를 내고 방앗간에서 쌀을 도정해 갔다. 그들이 지불한 도정료는 훗날 화서그룹의 기반이 됐다. 화서그룹은 우런바오가 불러온 변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 화시촌은 밭을 개간했다. 1980년대에는 공장을 세웠고, 1990년대에는 도시를 세웠다. 경제환경이 변화하면서 남들보다 앞서 새로운 소득원을 개발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우런바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청년시절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리고 우런바오는 실제로 화시촌을 끊임없이 변화・성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우런바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촌민이었다. 우런바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짓지 않았다.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해 오로지 촌민들의 윤택한 삶을 위한 제도를 시행한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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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런바오의 어록 

“관직을 갖는 것은 종신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민을 위한 봉사는 종신제다.”

“지도자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 번째,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두 번째, 인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 번째 항상 자기의 부족한 점을 찾아야 한다.”

“작은 인재를 크게 쓰는 것은 가능하나, 큰 인재를 작게 쓰면 그것은 무용하다.”

“집에 황금 수천톤이 있어도 하루 먹는 것은 세 끼이다. 가장 호화로운 집을 가져도 작은 침대 하나면 족하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물질과 정신은 남는다. 자손에게 재산을 남겨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좋은 형태의 정신이다.”

“큰 발전에는 작은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작은 발전에도 큰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발전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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