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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9 19:07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이익 나지 않는 사업은 손대지 않는다”
“이익 나지 않는 사업은 손대지 않는다”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6.03.03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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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巨商 미쓰이 타카도시(三井高利)

일본에는 상인(商人)이 화를 내면 제후도 놀란다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 상인은 무척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사농공상에서 가장 말단에 위치해야 할 상인들은 전쟁에 꼭 필요한 물자 중 하나인 자금을 손에 쥐고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확장시켰다.

일본의 상업정신에 영향을 끼친 에도시대 경제사상가 이시다 바이간은 자신의 저서 석문심학(石文心學)을 통해 “진정한 상인은 상대방과 자신을 모두 이롭게 한다”며 기업경영에 있어 기본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일본의 4대 재벌그룹 중 하나인 미쓰이(三井)그룹 창업자 미쓰이 타카도시(三井高利/ 1622~1694)는 기업경영의 기본에 충실해 오늘날 미쓰이그룹을 일궈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미쓰이 타카도시는 1622년 8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양조장과 대금업을 생계로 삼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타카도시와 다른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상행위에 관한 전반적인 흐름을 익히며 성장했다. 특히 그의 어머니 슈호(殊法)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머니가 집안과 지역을 위해 여러 가지로 봉사하는 모습은 훗날 타케도시를 비롯한 미쓰이그룹의 정신이 됐다.
당시 일본의 상인들에게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에 가게를 두는 것은 일종의 지위와 같았다. ‘교쇼우닝(京商人)’이라 불린 이것은 상인의 성공을 나타내는 잣대 같은 것이었다. 타카도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에도에 자신의 가게를 내고 싶어 했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큰 형 토시츠구 아래에서 한 개 점포를 관리하던 타카도시는 사업수완에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큰 형 토시츠구는 이런 동생을 경계하면서 자신의 손아래 두려했다. 마침 마츠자카에 있는 어머니 슈호의 병환이 깊어지자 토시츠구는 타카도시를 고향으로 내려보내기에 이른다. 
고향에서 어머니의 대금업을 도우면서 유유자적하던 타카도시는 1673년 토시츠구가 세상을 떠나자 보란 듯 자신의 야망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장사에 대한 미련을 버린 줄 알았던 타카도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에도에 아홉 자 넓이의 점포를 빌려 ‘미쓰이 에치고야’라고 이름 붙였다. 이때 타카도시의 나이는 52세였다. 보통이라면 은퇴할 나이지만 그는 “이제야 비로소 내 스스로의 장사를 한다”며 열정을 쏟아냈다. 


“강자가 놓친 틈새를 공략한다”

당시 대다수 포목점은 ‘미세모노 아키나이’라 부르던 주문판매와 ‘야키시우리’라는 방문판매가 중심이었다. 단골고객의 저택으로 주문을 받으러 가거나 상품을 들고 찾아다니는 판매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단골이 많고 적음에 따라 매출이 정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급 품목인 포목의 경우 단골고객은 무사 집안이나 대형 도매상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자주 들락거리는 업자를 굳이 바꾸려 하지 않았다. 하물며 마츠자카라는 시골에서 막 올라온 신참내기와 거래를 하려는 호기심 많은 고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타카도시는 자신의 약점을 너무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자본금도 없는 작은 가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면승부는 피하고 강자의 측면을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자가 손대지 않는 장소, 강자가 놓친 ‘틈새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기로 했다.
기존의 무가(武家)나 대형 소매상 같은 큰손고객은 배제한 채 ‘지방의 소매상’을 타깃으로 삼았다. 지방 상인들은 에도의 물건을 탐냈다. 그들은 ‘쇼코쿠 야킨도우리’라는 방식의 도매를 시작했다. 일종의 박리다매 형식으로 거래를 시작했는데, 이 방식은 회전율이 매우 높아 타카도시에게 큰 이익을 안겨 줬다.

시대를 읽는 통찰력

타카도시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이 탁월했다. 당시 일본은 서민문화가 싹트기 시작하면서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있었다. 또, 에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했다. 늪과 연못이 매립되면서 주(住)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고, 이어 의(衣)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를 간파한 타카도시는 에도 중심가의 점포에서 점두(店頭)판매를 시작했다. 주변의 큰 포목점들은 점두판매 따위는 구멍가게나 하는 짓이라며 손을 뻗치지 않았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타카도시는 이런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판매방식을 만들어 갔다. 
결제방식에 있어서도 독창성을 부여했다. 당시 거래는 1년에 두 번 지불하던 외상거래가 주를 이뤘다. 상인들은 이 금액에 가차 없이 이자를 붙였고, 이로 인해 옷감과 의복값이 매우 높았다. 고객과 상인 모두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거래했고, 서민층은 소외받기 십상이었다. 타카도시는 점두판매와 동시에 ▲염가판매 ▲에누리 없음 ▲소량판매 ▲현금거래라는 원칙을 내세워 장사하기 시작했다.
이 방식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던 장사치 즉, 상공(商工)인들이었다. 기존의 판매방식으로는 거주지가 분명치 않았던 이들의 수요를 채우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타카도시의 ‘미쓰이 에치고야’ 점두에서는 이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양만큼의 옷감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꾼들은 에치고야의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른 소비자들을 찾아 다녔고 이를 통해 타카도시는 시장을 서민들에게까지 넓힐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남과 다른 것을 만들자” 멈추지 않는 혁신

갈수록 타카도시의 점포에는 손님들로 넘쳐났다. 주변 상인들의 겁박에도 불구하고 ‘에치고야’를 믿고 거래하는 사람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다이묘(大名) 마쓰다이라 가문의 포목류 거래를 도맡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세는 한층 커졌다.
경쟁자들도 미쓰이 에치고야의 경영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점포간 차별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되는 상황에 처하자 타카도시는 또다시 새로운 방식을 연구해야 했다.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경영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애썼다. ‘남들과 다른 것’을 만들어 내기위해 노력했고 그는 자식들과 상의 끝에 ‘광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전적으로 평판과 소문에 의지하던 시대상황을 다시 한 번 깨부수고 나온 것이다.
타카도시는 비오는 날 손님들에게 우산을 무료로 빌려줬다. 그 우산에는 ‘미쓰이’라는 커다산 상표를 새겨 넣었다. 소나기라도 오는 날이면 길거리에는 미쓰이라는 상호가 난무했다. 양심 있는 손님들은 날씨가 갠 뒤 우산을 다시 돌려줬지만 돌려주지 않는 손님도 상당했다. 그러나 타카도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우산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 기뻐했다. 이 광고전략의 진짜 목적은 ‘이 우산은 고급우산으로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키워드였기 때문이다.
타카도시의 광고전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연극작가들에게도 부탁해 “비단이라면 그 유명한 미쓰이 상점의 것이어야지!”라는 대사를 끼워 넣기도 했다. 이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미쓰이 에치고야가 취급하는 비단은 최고’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힘들수록 왕도로 돌아가라”

타카도시의 ‘미쓰이 에치고야’는 불황 속에서도 유달리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손익을 엄격하게 계산해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손대지 않는다’는 방침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1683년 미쓰이 에치고야의 본점을 스루가로 옮겼을 때도 금융가에 환전상을 열었을 뿐, 다른 신규사업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꽝산경영·농경지 개발 등은 분명 커다란 이익을 가져올 수 있지만 한 번의 실패로 회사의 뿌리가 흔들릴 수도 있는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타카도시의 경영신념은 막부(幕府)를 상대로 한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687년 타카도시는 막부의 옷감 납품상인으로 임명됐다. 막부의 포목을 전담해 조달하는 것은 당시 포목상으로서 가장 권위 있는 일이었는데, 타카도시 역시 이런 권위가 점포의 발전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이라 판단했고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그는 고작 몇 해 만에 이 일을 그만 뒀다. 불과 10% 남짓의 이익에 부대비용을 감안하면 적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사업이 크게 번창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누리기도 했다. 이와 함께 교토와 에도 간 현금이 오고가는 일도 잦아졌고, 환어음을 발행하고 환전상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 환전상은 후에 다이묘를 상대로 한 대부업으로 발전했는데 “다이묘 가에서는 빌린 돈을 갚으려는 성의가 없다. 다이묘 대부를 계속했다간 점포가 망한다”는 판단 하에 차츰 그 영역에서 발을 뺐다. 
다카도시의 이런 기업가 정신은 오늘날 불황에 허덕이는 기업들에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철저하게 코스트를 삭감해 쓸데없는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고, 고객서비스나 인재육성, 정보수집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자금을 투입했다. 단순한 검약이 아니라 낭비가 아닌 돈은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화려한 기교와 절묘한 경영전략이 아닌 경영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을 지킨 것이 오늘날 미쓰이그룹의 초석을 깔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다소 체면이 깎이고, 설사 기업의 권위가 떨어지더라도 채산이 맞지 않는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내는 용기와 자신의 강점을 더욱 강화시킬 결단력이 필요하다. ‘힘들 때 일수록 장사의 왕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곱씹어 봄은 어떨까.
 

미쓰이 가문의 점훈(店訓)
1. 근검절약은 집안을 부유하게 하고 사치는 몸을 망치는 원인이 된다.
2. 결혼, 빚, 보증에 대해서는 모든 일족과 상의하여 결정하라.
3. 매년 수입의 일부를 적립하여 일족에게 분배하라.
4. 일족의 구성원은 일생동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본점에서는 지점의 회계감사를 자주 시행하고, 수지가 문란하지 않게 하라.
6. 장사를 번영케 하는 것은 우수한 인재들이다. 젊고 우수한 인물을 선별해 쓰도록 하라.
7. 지금하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가업과 연관이 없는 쓸데없는 것을 하지 말라.
8. 일족의 자식은 누구든 어릴 때부터 데타이(사환)부터 시작해야 한다.
9. 결단력이 중요하다. 옳다 싶은 것은 과감하게 결단하고 추진하라.
10. 일족 중에서 부정한자가 있으면 공동 상의해서 처벌하라.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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