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과 독일기업의 경영비법
이병철과 독일기업의 경영비법
  • 민석기 기자
  • 승인 2016.03.0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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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과 독일의 흔들리지 않는 원칙주의

삼성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1910~ 1987). 그는 분명 일개 기업가가 아니라 국가 발전이란 명제를 앞에 놓고 고민했던 위대한 사상가(철학가)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호암의 성공 과정과 비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돈병철’이라고 비아냥거리거나, 진실이 가려지지 않은 ‘사카린 밀수사건’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호암에게서 배워야 할 98가지의 장점은 간과한 채, 2가지의 단점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1971년 연말에 열린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호암 이병철 회장은 “사업은 어디까지나 사업성을 따져서 해야 한다. 정치와 야합을 해서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며 계열사 사장들에게 사업의 원칙을 철저히 주지 지켰다. <사진제공: 호암재단>

호암은 분명 10년, 100년을 앞서 나갔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잘살 수 있게 할까를 고민했고, 그 방안으로 기업가의 길을 선택했다. 사업을 정할 때는 ‘돈이 되느냐’보다 ‘무엇을 만들면 국민에게 도움이 될까’를 항상 고민했다.
과거 헐벗고 굶주린 국민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초기 사업을 비롯해 50여 년간 다각도로 벌인 제조업, 금융업, 미디어산업도 다 그랬다. 최대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글로벌 전자업계의 으뜸이 된 삼성전자의 주춧돌을 놓고 튼튼한 기둥을 세웠다는 것이다.
호암은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했고, 몰이해에서 오는 비난이 많았지만 그걸 다 참아냈다. ‘국가관’이 확고하게 뒷받침된, 생각의 차원이 다른 기업인이었다. 그래서 호암은 분명 일개 기업가가 아니라 국가 발전이란 명제를 앞에 놓고 고민했던 위대한 사상가(철학가)였다는 재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호암의 생활습관, 사고방식, 기업운영 방식 등은 독일인, 독일기업, 독일문화를 꼭 빼 닮았다. 호암은 일본을 자주 드나들며 일본 기업인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일본’과 흡사한 기업인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호암은 ‘독일스럽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일본은 호암과 독일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사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지휘 아래 유럽을 석권한 독일을 철저히 벤치마킹했다.
일본의 헌법과 각종 법률, 행정, 군사, 교육 등 각종 시스템은 모두 독일에서 들여온 것이다. 정신적 측면도 그렇다. 기술자를 중시하는 장인(마이스터) 정신,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완벽주의와 질서의식, 준법정신, 무슨 일을 벌였다 하면 끝장을 보는 철저함, 정확성, 조직력,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들이 모두 독일의 특징이다.
일본은 이러한 게르만 정신을 제도와 함께 들여와 나라와 국민을 개조(근대화)시켜 나갔다. 그 일단이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에 흘러 들어와 근대 한국의 일부 뼈대가 된 것이다. 초일류 기업 삼성을 창조한 호암과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한 독일의 ‘공통분모’는 분명 시대를 초월한 성공비법이 될 것이다.

1970년대 군산에 세대제지라는 업계 2위의 제지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가 살림이 어려워지자 삼성에 인수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정부도 그걸 원했다. 
그래서 호암의 한 측근 인사는 ‘회사 소유의 땅이 많은 데다 조건이 좋으니 인수하자’고 호암에게 건의했다. 그런데 호암은 ‘혼자 독점하면 안 된다. 같이 경쟁해야 한다’면서 거절했다.
3공화국 시절, 김용환 재무부 장관의 이야기다. 당시 단자회사를 도입할 때의 일인데, 정부는 삼성에 신청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호암은 대뜸 ‘그거 고리대금업 아닌가. 난 그렇게 돈 벌고 싶지 않다’고 일축했다. 
이 일화로 인해 호암 측근들은 예나 지금이나 ‘호암은 철저하게 정도(正道)를 걸으려고 생각했던 분’이라고 회상한다. 
호암은 사람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이 사원을 채용할 때면 가끔 호암의 친인척이 면접에 올라오기도 했는데, 호암은 실력이 안 된다고 판단하면 바로 ‘너 공부 더 하고 오라’고 돌려보냈다. 
그러니 인사에 사사로운 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군사정권 때에는 군인들의 인사청탁이 많았는데, 호암은 이를 굉장히 경계했다. 호암은 인사 담당자들에게 철저히 조사해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검증돼야만 썼다.
성균관대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호암은 도(道) 교육을 해야겠다는 취지에서 성균관대를 인수했고, 이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공계 대학을 수원캠퍼스에 세우려고 할 때 학생회장이 학생처장 멱살을 잡은 일이 있었다.
호암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성균관대 운영을 포기했다. ‘도 교육을 그토록 했는데 어떻게 학생이 선생님 멱살을 잡을 수 있느냐. 그런 학교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인, 원칙과 신뢰에는 양보 없다

우리에게 독일 또는 독일인이라고 하면 크게 두 가지 대비되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나치, 히틀러, 비스마르크, 독일병정이란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전체주의, 냉혹, 엄격 등으로 상징되는 독일의 나쁜 이미지다. 다른 하나는 괴테, 쉴러, 칸트, 베토벤, 바흐, 아인슈타인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독일인들이 문학·철학·과학·음악 등에 두루 뛰어나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독일 이미지다.
언뜻 보면 판이하게 대조되는 두 이미지인데, 독일에서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 극단의 대비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필자가 독일 중소기업을 연구하기 위해서 지난 2007~2008년 독일에 체류하며 만나본 독일 사람들도 크게 분류하면 이 두 가지 카테고리 중 하나에 속했다.
외국인에게 불친절하고 딱딱하고 인정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반면에 자상하고 부드럽고 예술적이고 고고한 사람들도 많았다. 따지고 보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이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겠지만 독일 사람들에겐 그것이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싶다. 
양해경 삼성유럽본부 사장은 1973년 제일모직 함부르크 지점 주재원으로 처음 독일 땅에 발을 디딘 이후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독일을 지키고 있다. 그를 2008년 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에서 만난 적이 있다. 독일인에 대한 평가를 물어봤다. 
양 사장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독일인들의 장점은 근면 검소하고,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합리적이고 계획성 있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원칙과 신뢰에 대한 문제는 양보가 없다”고 했다.
차범근 감독이 예전에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할 때의 일이다. 당시 독일 사람들이 ‘차붐’을 보고 세 번 놀랐다고 한다. 첫째는 체구가 작은 아시아 선수가 독일에 진출한 외국선수 가운데 골을 가장 많이 넣을 정도로 공을 잘 찬다는 사실에 놀랐고, 둘째는 축구선수가 명문 사립대학(고려대)의 경영학과를 나왔다는 사실에 더 놀랐고, 셋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선수가 경영이나 경제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별로 없다는 것에 대해 더더욱 놀랐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독일 교민들 사이에서 전해진다. 원칙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독일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호암은 1979년 12월 10일 정례 사장단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업은 어디까지나 사업성을 따져서 해야 한다. 정치와 야합을 해서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지금까지 정치와 야합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런 경영방침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호암의 원칙주의 기질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호암은 초창기부터 삼성 사풍에 직언하는 전통을 세우려고 부단히 애썼다. 다음은 1965년 3월 호암이 전 임원에게 특별지시를 한 내용이다.
“전 직원이 직언하는 전통을 세우고 소신대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쉽다. 개인간에도 친근할 수 있도록 솔직한 충고를 해주듯이 만약 시정할 점이 있다면 임원 상호간에도 서로 충고하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바탕이 이룩되어야 하겠고, 전 직원이 상사에 대하여 회사의 일에 관한 한 조금도 가식 없이 사실과 소신대로 직언하는 기풍을 길러야 하겠다. 만일 직언이나 솔직한 충고를 꺼려 적당주의에 흐른다면 경영면에서는 부하의 부정을 묵인, 조장하여 그 사람의 앞날이나 회사 장래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하의 참된 의견이나 건의를 묵살, 봉쇄하는 결과가 되기 마련이며 이것이 상습·고질화되는 날에는 회사 안에 인재가 클 수 없고 업무는 침체일로를 걷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로 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1815~1898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수 백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독일제국 재상으로 있을 때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의 정책을 실행해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남겼다. <출처: 리더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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