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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로벌 메이저 플레이어’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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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6.01.28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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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무한 도전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려면 앞으로 달려 나가는 길 뿐이다”

박현주(58)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샐러리맨의 신화’의 주인공이다. 저축의 시대를 펀드투자의 시대로 돌려 한국 자본시장의 생태계를 180도 바꿔놓은 개척자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 자본금 100억 원으로 출발한 박 회장의 미래에셋은 그야말로 ‘폭풍성장’을 해왔다. 
SK생명에 이어 국내 최대 증권사인 대우증권까지 과감히 인수한 미래에셋은 19년 만에 고객자산 320조원, 자기자본 10조원이 넘는 거대 금융그룹으로 우뚝 섰다. 재계 순위도 30위권에 올라섰다. ‘실패하더라도 한국자본시장에 경험은 남는다’는 의지 하나로 한국 금융영토를 확장해온 박 회장의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정신은 지금의 상황에 딱 들어 맞는 ‘인사이트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KDB대우증권 합병을 둘러싸고 경제계가 연초부터 술렁이고 있다. 현재 대우증권의 주가보다 약 60% 이상 높은 2조4000억 원의 파격적 인수가격을 제시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때문이다. 이를 두고 금융업계는 물론 투자자들의 궁금증도 눈덩이처럼 커졌다. 일각에서는 박 회장이 대우증권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에,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통 큰 베팅을 했다고 말한다. 
“이병철, 정주영 회장 이런 선배들이 어떻게 (회사를) 만들었냐고 하면 그 당시에선 불가능한 세상을 꿈꿨다는 것입니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려면 불가능한 꿈을, 불가능한 상상을 재무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열정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상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금융계의 삼성전자’를 꿈꾸는 박 회장은 일찍이 자서전을 통해 “내 인생 목표는 미래에셋금융을 아시아 1위 투자금융회사로 만드는 것”이라며 “미래에셋금융이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골드만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모든 포부와 꿈과 희망이 대우증권 인수로부터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타고난 투자가…‘금융의 삼성전자’ 꿈

박현주 회장은 요즘 말하는 금수저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유층 자제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던 그가 증권시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견지명이었는지, 돈 관리 하는 방법을 익히라는 뜻으로 그의 어머니께서 1년 치 학비와 생활비를 한꺼번에 부쳐줘 이 돈으로 주식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됐다.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던 그는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즈음이던 1984년 ‘내외증권연구소’라는 작은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주식투자로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도 하나 얻었다. 당시 26살 대학원생이었으니 타고난 투자가인 셈이다. 
당시 증권시장은 소문에만 의존하던 엉성한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시장분석의 중요성을 실감한 그는 ‘한국 증권시장에 대한 전망’이라는 자료를 만들었다. 이는 훗날 일본 노무라증권보고서로 탈바꿈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한 2년 후 박 회장은 돌연 투자자문회사의 문을 닫고 증권회사 입사를 결심했다. 개인사업자가 독자적인 브랜드를 내세워 시장에 뛰어들만한 시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특채 하겠다는 증권사도 있었지만 박 회장은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영업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증권가 최고의 스타였던 이승배 동원증권 상무의 영업스타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여러 차례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포기하지 않았던 박 회장은 입사한 후 45일 만에 대리로 승진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았다. 
코스피지수가 1000을 넘어선 직후 폭락을 거듭해 모든 사람이 지점 업무를 꺼리던 1989년 박 회장은 지점장을 지원했다. 이후 일본 노무라증권의 전략을 벤치마킹해 자신만의 영업방식으로 승승장구한 박 회장은 1993년 1조4000억 원의 주식약정(매매체결액)을 올리며 전국 1위의 지점으로 급부상했다. 이듬해에는 압구정지점에서 2년 연속 전국 증권사 지점중 약정고 1위의 기록을 세웠고 급기야 1995년 동원증권 강남본부장 겸 이사로 발탁됐다. 
2년 후 그는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입이 보장되던 자리를 박차고 탈샐러리를 선언했다. 미래에셋캐피탈(구 미래창업투자)설립을 위해서였다.

“불가능은 없다”…실패 딛고 과감한 투자 ‘적중’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에도 장점이 많지만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잘 나가던 직장을 박차고 나온 박 회장은 국내 산업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미래에셋의 초창기는 운용사 인허가의 어려움으로 벤처캐피탈로 시작됐다. 이듬해 외환위기 구조개혁 차원에서 자산운용업의 설립규정이 100억 원으로 낮아지면서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설립됐다. 
박현주 회장과 미래에셋이 대한민국 금융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국내 1호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가 성공을 거두고 최초의 부동산 펀드 및 PEF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미래에셋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1999년 고객에게 금융솔루션을 제공하자는 취지로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고 2005년 미래에셋생명을 출범시켰다. 미래에셋증권은 종합자산관리를 지향, 차별화된 전략을 통해 국내를 대표하는 증권사 중 하나로 성장했으며, 미래에셋생명은 해지환급금을 높인 ‘진심의 차이’ 변액보험을 출시하는 등 고객에게 다가가는 은퇴설계의 명가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박 회장에게 항상 성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래에셋 인사이트 펀드가 그 대표적인 사례. 2007년 박 회장은 하루가 다르게 떠오르는 중국 증시를 눈여겨 보고 이 펀드에 올인했다. 당시 그는 중국사업의 전도사로 불릴 정도였다. 출시 2달도 안 돼 대략 4조8000억 원이 몰려 대중들에게 박 회장의 명성과 능력을 충분히 각인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발 금융위기와 맞물리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중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원금이 거의 반 토막 난 것이다. 주식형펀드의 연간수익률도 마이너스 11.61%로 급락했다. 
잘 나가던 박현주라는 이름 석자에 상처를 입은 이때부터 그는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고 핵심사업에서 주식의 비중도 점차 줄여나갔다. 채권 투자는 물론 해외기업투자, 부동산 투자에 이르기까지 대체투자도 마다하지 않았다. 매번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으며 실추된 성공신화를 다시 세우려 했고, 과감한 배팅을 주저하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이것이 또 한 번 적중하면서 미래에셋은 재도약의 날개를 달았다. 특히 상하이 미래에셋타워, 하와이 페어몬트오키드호텔, 페덱스 물류센터 등에 투자해 상당한 성과를 냈다. 상하이 미래에셋타워의 경우 당시 2600억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으로 사들여 주변에서도 난색을 표했는데, 현재 이 건물의 자산가치만 1조3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의 판교 코트야드 메리어트, 신라스테이 동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등은 모두 미래에셋증권이 투자한 부동산이다. 
이쯤 되자 하버드대학도 창업가 박현주와 미래에셋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HBS)의 연구진들이 지난 2009년 11월 미래에셋 본사를 방문, 계열사 주요 경영진 및 외부 유력인사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듬해에는 박현주 회장의 성공스토리를 연구 교재로 채택했다. 아시아 투자기업인 중 최초였다.

“‘최고의 부자’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겠다”

이제 박 회장은 다시 본연의 업무인 증권을 통한 성장을 노리고 있다. 2조4000억 원에 대우증권을 인수한 것은 결국 글로벌 메이저 플레이어로 뻗어나가겠다는 전략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지난해 금융업계를 강타한 인터넷 전문은행 설립과 관련해서도 미래에셋은 초창기 열의를 불태웠지만 이내 곧 철수해버리고 말았다. 이는 ‘잘 하는 것만 잘 하자’는 박 회장의 경영방침에 따른 전략이었다. 
미래에셋과 박현주 회장에게는 ‘최초’, ‘최고’, ‘강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업력으로 따지면 신생사에 불과하지만 미래에셋이 거둔 성적표는 여느 선발금융사 못지 않다. 미래에셋증권,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생명보험 등 오늘날 미래에셋을 일군 주요 계열사들은 저마다의 영역에서 확고한 경쟁력을 구축하고 있다. 이제는 국내 자본시장의 강자를 넘어서 아시아 자본시장을 선도하는 글로벌 금융그룹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 회장의 오랜 꿈이 척척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이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사회라는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한국 자본시장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또 한 가지, 한국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기 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겠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시민으로서의 미래에셋을 설계했다.
그가 1998년 4월, 창업한지 10개월 만에 미래에셋육영재단을 만들고 이어 2000년 3월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설립한 것에서 탁월한 안목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명의를 딴 재단은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해외교환장학생, 국내교환장학생, 글로벌투자전문가장학생 등 3가지 프로그램에서 약 6천명에 달하는 장학생을 육성했다. 이밖에도 글로벌리더 대장정, 스쿨투어, 우리아이경제교실 등 어린이 경제교육을 통한 인재육성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미래에셋의 통계에 따르면 약 12만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미래에셋 경제교육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박 회장은 지난 2010년부터 배당금 전액을 기부하고 있으며, 전체 기부액은 다섯 차례에 걸쳐 168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청년일자리 해결을 위한 ‘청년희망펀드’에도 20억 원을 쾌척했다. 또한, 박 회장과 미래에셋 임직원들은 ‘급여 1% 기부’와 ‘통일나눔펀드 기부’등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기업은 투자를 먹고사는 생물…야성을 잃으면 죽는다”

박 회장의 이런 행동은 ‘이익의 사회 환원은 자선이 아니라 일상적인 기업 활동이 돼야 한다’는 그의 소신에서 비롯된다. 
박 회장은 “1억 원, 10억 원을 투자해 키운 인재가 나중에 100억 원, 1000억 원을 벌어온다면 이보다 좋은 투자가 어디 있겠느냐”며 “굳이 미래에셋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어디선가 대한민국을 위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면 보람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또 박 회장은 평소 “회사가 얻은 열매를 작은 부분이라도 전체 직원들과 나누려고 한다”고 말해 왔다. 그는 이미 주력회사 주식의 20% 이상을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2011년과 2012년에 이어 2013년 6월 배당금 전액인 34억3천만 원을 기부했다. 기업 오너로서의 잇속을 채우는데 급급한 이른바 ‘천민 자본주의자’가 아닌 ‘배려가 있는 상생의 자본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박현주 회장의 인생을 관통하는 화두는 ‘도전’이다. 
박 회장의 도전을 통한 성장은 미래에셋그룹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고민을 많이 하지만 일단 마음을 굳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는다. 그 때문에 직설적인 언어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룹 중역회의에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도 “그래서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는가”라고 한다. 동원증권 중앙지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점훈(店訓)도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려면 앞으로 달려 나가는 길 뿐이다”라고 전해진다. 이런 그의 직관적이고 승부사적인 기질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모두가 지금 한국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성장동력을 상실한 경제를 대변하듯 증권시장도 수년째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내외적인 경제 침체 속에 많은 기업들은 투자는커녕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위기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전략적이면서 공격적인 박 회장의 최근 투자 행보가 돋보이는 것도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것으로만 보였던 ‘기업가 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투자를 먹고 사는 생물이다. 야성이 줄면 관리는 쉽지만 조직은 생명력을 잃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박 회장의 경구는 그런 점에서 CEO들이 곱씹을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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