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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떠오른 처칠의 ‘긍정 리더십’
다시 떠오른 처칠의 ‘긍정 리더십’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6.01.04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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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웃을 수 있다면 저는 한 번 더 넘어질 수 있습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예일대 로버트 실러 교수는 현재 세계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1937년의 경제상황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한다. 실러 교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장기간 실의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 상태”라며 “사람들이 장기적인 미래경제에 대해 점점 더 불안해 하는데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공군이 런던을 공습하던 9개월간의 런던대공습 시절처럼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최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스스로를 반짝반짝 빛나는 ‘벌레’라고 표현한 처칠의 어떤 면이 현대인들이 마음을 사로 잡고 있을까?

늘 최하위권을 맴돌던 아이

한 아이가 1874년 영국 옥스퍼드셔주 우드스톡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고 아버지는 37세에 재무장관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년시절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성공했지만 우울한 성격을 지녔다.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아야 하고 겉과 속이 조금은 다른 기존 정치인들의 생존 DNA도 갖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연일 정치에만 몰두했다. 어머니는 가족보다 자기 자신을 더 아꼈다. 바람이 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교적이었다.
때문에 그 아이는 9살 때부터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다. 성적도 좋지 않아 항상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이 정도의 실력으로는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은 꿈도 못 꾼다. 변호사가 되기에는 머리가 나쁘고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안 좋고 다른 뛰어난 능력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군인이나 되라”고 말하곤 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단점이 많았다.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는 ‘호감’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키는 170cm가 되지 않았고 뚱뚱한 체형에 얼굴은 불독을 닮았다. 13세 때 폐렴을 앓은 이후 평생 재발로 고통 받았고, 심장발작의 위험에도 항상 노출 돼 있었으며, 말도 심하게 더듬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심한 우울증이었다. 스스로를 ‘검정개’에 비유할 정도로 심각했다. 밤낮없이 업무에 몰두한 후 잠자리에 들어서는 벼개를 껴안고 엉엉 소리 내 울었다고 한다. 그만큼 스스로를 보잘 것 없다 여긴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보수당과 자유당을 오가며 90평생 중 55년을 의회에서 보냈고, 장관으로 31년을 재임했다. 9년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으며, 그 기간 중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이 인물이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꼽힌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실패의 연속

말더듬이 치고는 뛰어난 글 솜씨 덕분에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작가였던 처칠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보수당 내각에서 정치에 입문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자유롭고 진보적인 성향과 자유당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 1904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때부터 정치인 처칠은 승승장구 했다. 통상장관, 식민장관 그리고 해군장관을 역임하면서 자유당의 핵심으로 급부상했다. 그 시기 유럽정세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처칠이 해군장관을 역임하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의 총성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국가들은 패를 갈라 싸우기 시작했고 영국도 이 전쟁에 참여했다.
해군장관 처칠은 1915년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점령하기 위해 갈리폴리 작전을 감행했다. 무스타파 케말이 이끌던 터키군을 얕잡아 본 처칠은 육군과의 협동작전 없이도 곧장 이스탄불을 향해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함포를 일제히 사격한 후 상륙하는 해군만의 독단적인 작전을 수행한 결과 20여만 명의 영연방 젊은이들이 희생됐고 처칠은 장관직에서 사임, 중령계급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아 전장의 최전선으로 갔다.

“처칠과 같은 내각에 있고 싶지 않다”

2년 뒤 자유당은 다시 처칠에게 손을 내밀었고 군수장관, 육군 및 공군장관 등 요직을 거쳤다. 처칠은 그렇게 다시 중앙정계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자유당 내의 정치적 노선으로 갈등하던 처칠은 1924년 다시 보수당에 입당한다. 보수당원들은 처칠을 ‘배신자’, ‘철새’로 낙인찍은 지 오래였다. 총리인 체임벌린조차도 “천국의 즐거움을 모두 준다 해도 처칠과 같은 내각에 있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재무장관으로 영국의 재건을 책임지게 된 그는 노동자 총파업 때 강경한 입장으로 보이는 등의 막무가내 식 정책을 펼쳤다. 1925년에는 스스로 ‘가장 큰 실수’라고 인정한 금본위제도를 환원시키는 정책을 통과시켰다. 그는 세계 금융계에서 파운드화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웠다.
당시 영국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력이 많이 약화 돼 신흥국인 미국보다 그 국력이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금본위제도의 복귀는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영국 산업의 수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인위적인 파운드화 강세는 석탄, 섬유, 철강 같은 주력산업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경제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빠뜨렸다.
처칠은 정치적인 인맥관리를 소홀히 하기도 했다. 그는 태생이 영국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영국의 정치는 토론과 합의를 중시하는데 반해 처칠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독단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처칠의 이런 성품은 전후 재편된 유럽을 바라보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처칠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파시스트를 용납하는 일은 결코 안 되며, 유럽이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은 히틀러의 나치즘을 막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보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급급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막연한 공포보다 현재의 평화를 선택하게 했다.

“난관을 뚫고 갈 사람은 나밖에 없다”

1939년 영국 체임벌린 내각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독일과 협상을 벌여 전면전은 피하자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협상을 진행하면서 유럽의 국가들을 하나씩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국가들과 베네룩스 3국은 물론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나라들까지 독일의 손에 떨어졌다.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유일한 동맹국 프랑스마저 독일과 굴욕적인 강화를 앞두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독일의 속국이 될 것인지, 저항하며 싸울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영국정치의 수뇌부들은 이런 상황을 예견한 처칠에게 총리직을 맡기기로 했다. 처칠은 훗날 진심으로 총리가 되고 싶었고 영국이 처한 난관을 뚫고 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회고했다.
1940년 5월 13일 총리임명 승인을 받기 위해 하원에 출석한 처칠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했다.
“저는 오늘 비극적인 사실을 말하려 합니다. 유럽은 히틀러에게 굴복 당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영국입니다. 하지만 저는 국민들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국민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입니다. 앞으로 기나긴 투쟁과 고된 시련의 세월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기만적인 강화조약보다 전쟁을 선택할 것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을 하는 목적은 승리입니다. 파시즘에 굴복당하지 않는 자유민의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우리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단결된 힘이 기필코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승리를 위한 처칠의 열망은 그간 성과 없는 협상에 지쳐 있던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하원은 만장일치로 처칠의 총리 임명안을 가결했다. 그는 곧 보수당과 자유당을 막론한 거국적인 내각을 구성했다. 처칠은 총리와 국방장관, 해군장관까지 겸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때 전권을 쥐게 된 것이다. 
1940년 9월 11일 독일 공군기가 런던을 최초로 공습한지 나흘 후 BBC 라디오에서는 처칠의 연설이 흘러 나왔다. 그는 영국인들에게 감정이 실린 열띤 음성이 아닌 건조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The Finest Hour

“우리는 다음 주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과거 그 어느 때 보다 인류의 생명, 문명, 미래에 대해 더 큰 규모로, 더 치명적인 결과를 몰고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를 상기하고 분발합시다. 앞으로 영연방이 1000년간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지금 이때야말로 가장 좋은 시절(The Finest Hour)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공습의 공포에 떨고 있던 런던 시민들에게 처칠의 연설은 마법 같은 힘을 발휘했다. 이후 런던은 4만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 시민의 4분의 1이 집을 잃는 9개월간의 공습을 의연하게 버텼고 독일도 영국본토 침략의 꿈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여느 총리들과 다르게 처칠은 연설문을 스스로 작성했다 그는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장을 작성하는데 있어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연설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하게 미사여구를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했다는데 있다. 처칠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파악했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역사를 우리 선조들도 경험했던 ‘고통과 투쟁의 역사’로 부각시켰다.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존재라는 자긍심을 일깨워 동기유발을 할 수 있었다. 
처칠은 결단을 주저하거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비록 전쟁터에서 일어난 절망적인 소식도 국민들 앞에서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진실을 토대로 더욱 강한 용기를 요구했다. 그는 솔직했다. 역사학자 앤드류 로버트는 “처칠의 연설에는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결의는 가득하나 어떤 방식으로 히틀러와 싸워 이길 것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은 들어 있지 않다. 처칠은 영국의 힘만으로는 독일을 물리칠 수 없고, 미국과 소련이 참전해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총리가 된 1940년 5월부터 미국이 참전한 이듬해 12월까지 19개월 동안  그도 확신할 수 없는 승리를 장담하며 전쟁을 이끌어나갔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리더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용기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영국의 모든 것을 이끌고 있는 자신이 넘어진다면 영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처칠이 연단 위에 오르다가 넘어지자 청중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는 “여러분이 웃을 수 있다면 나는 한 번 더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중절모에 시가를 물고 한손으로 V를 그리는 포즈를 즐겨했다. 승리의 V를 내보이며 영국인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준 것이다. 리더의 유머는 조직을 여유있고 풍요롭게 만들며,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처칠은 이것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리더였다.

처칠이 주는 긍정의 리더십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리더의 권위적인 느낌을 상쇄한다. 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비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일 중독자’ 처칠은 부하직원과 관리들을 심하게 다루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처칠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리더십이 자유, 공생 그리고 조직의 승리를 위한 것임을 보여줬고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4만300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낸 런던 대공습 기간을 ‘가장 좋은 시절(The Finest Hour)’이라고 부르니 그의 ‘마법’은 반세기를 넘어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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