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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이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폐하뿐이십니다”
“자고로 이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폐하뿐이십니다”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5.12.0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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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과 名臣 위징

‘정관지치(貞觀之治)’. 당(唐)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끈 당 태종 이세민의 공덕을 치하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세민은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을 도와 당나라를 건국했지만,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냉혹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그의 비정함과 잔혹함 대신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묘사하고 ‘정관지치’를 우선 기억한다. 

정관지치를 말할 때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문화 교육, 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두루 공적을 남긴 이세민을 떠올린다. 그러나 황제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위징(魏徵)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둘은 서로의 재능을 아끼고 보완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개척했다.

군신관계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이세민과 위징은 적대적 관계로 서로를 알게 됐다. 태자 이건성의 휘하에 있던 위징은 이세민을 없애 후환의 싹을 제거할 것을 수십 차례 간언했다. 하지만 이건성은 이를 새겨 듣지 않았고 결국 이세민에 의해 현무문에서 숙청됐다.
거사 후 이세민은 위징을 불러 “그대가 우리 형제를 이간시킨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위징은 “태자께서 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이오”라 말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위한 충언이 허울이 될 수 없다 여긴 이세민은 위징의 솔직함과 그릇에 매료돼 그를 중용했다. 
이세민이 위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요동정벌 실패 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위징이 죽은 후인 정관 19년 요동정벌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이세민은 장안으로 들어오면서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분명 짐의 요동정벌을 막았을 텐데, 그랬다면 오늘같이 비참한 패배도 없었을 것을.(魏征若在, 不使我有是行也)”
그러나 그의 요동정벌은 진작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대의 뜻을 밝혔음에도 그 누구도 당 태종을 설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세민은 뼈저린 실패 후에 위징을 떠올렸다. 이는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세민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면 항상 위징을 찾았다. 위징은 그가 지닌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감히 간언하고, 능히 간언했으며, 훌륭히 간언했다

구당서 위징전에는 위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용모는 보잘 것 없지만 담력과 지식이 남달라 거침없이 간언했다.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자신의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위징이 어떻게 그렇게 황제에게 거리낌 없이 간언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위징의 세 가지 특징이 거침없는 언사를 가능하게 했다고 기록한다. 우선 위징은 나라를 경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조언은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을 줬다. 이세민은 그의 도움으로 정국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성격이 매우 직설적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역린(逆鱗)을 건드린다는 것은 당시 목숨을 걸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위징은 여기서 다른 인물들과 달랐다. 
또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준 이세민에 대한 보답이었으리라. 인재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간언을 할 수 있었다.
이세민은 위징을 몹시 아꼈다. 즉위 후에도 위징을 여러 차례 침소로 불러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이세민은 그의 간언을 물리치지 못했다. 위징도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 기뻐했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반드시 정사에 쓰이게 하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태종에게 알려줬다.
위징은 간언함에 있어 과감했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이치를 분명하게 전달했으며 상황에 맞게 황제의 잘못을 지적했다. 위징은 황제를 치켜세운 후 비판하는 방법을 주로 썼다. “자고로 이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폐하뿐이십니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이 방법은 황제가 잘못을 고치게 하는데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오해를 막는 역할도 했다.
위징은 생각을 정리하고, 근거를 내세우며 황제를 설득하는 간언의 3박자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의 간언은 이세민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이를 고치는데 큰 도움이 됐으며 결국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됐다. 황제가 자신을 칭찬할 때에도 위징은 이 모든 것이 황제 덕분이라는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독려하는 황제가 있었기에 뜻을 굽히지 않고 옳은 말을 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물론 그게 사실이기도 했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 이세민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이세민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격려함으로써 정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나무가 자라게 하면 뿌리를 굳게 하고, 강물이 멀리 흐르기를 바라면 그 바닥을 깊게 해야 한다(求木之長者, 必固基根本, 欲流之遠者, 必浚基泉源)’

위징은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이는 이세민의 정치방향과도 일치했다.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통해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이세민에게는 훌륭한 정치를 펼쳐야할 이유가 있었다. 현무문의 변 이후 이세민은 평화와 타협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회의 갈등이 계속되면 통치에 걸림돌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관시대를 거치면서 당나라의 국력은 강력해졌고 민생은 안정됐다. 후대의 어떤 황제도 이를 따라잡기 어려웠고 이에 많은 황제들이 정관시대를 목표로 삼았다. 정관의 정치노선은 이인위본(以人爲本)에 바탕을 두고 철저하게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모든 문제가 군주의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이세민은 일찍이 “군주의 도는 먼저 백성들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상은 당시로서는 꽤 선진적인 것이었다. 
이세민이 왕위에 오른 해인 정관 원년, 우복야(右僕射) 봉덕이(封德彛)가 국가 병력을 점검했다. 그는 당시 병력이 모자라다고 판단, 18세 이상의 중남(中男)들을 징병할 것을 황제에게 간언했다. 본래 병역의 의무는 스무 살이 넘은 ‘정(丁)’이 지는 것이었지만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이세민도 봉덕이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이와 관련된 칙령을 세 번이나 내렸지만 위징은 어찌된 일인지 이를 한사코 통과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상소를 올려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중남은 아직 성인이 아니므로 병역의 의무를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대략적인 요지였다. 
하지만 봉덕이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중남도 겉으로 보면 강건한 사나이나 다름없다면서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화가 난 이세민은 계속 칙령을 내렸지만 위징은 끝내 서명을 거부했다. 
황제는 위징을 불러 “중남이라 할지라도 체구가 작고 왜소하면 입대가 불가능할 것이다. 반대로 건장하고 힘이 세다면 당연히 출병을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그렇게 고집을 피우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위징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이듬해에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닭을 잡아 계란을 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위징은 국가의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해 중남의 징병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젊은이들을 모두 징병하면 수역과 세금은 과연 누가 부담할 수 있습니까? 훗날 다시 징병해야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백성들의 힘을 한꺼번에 쓰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정치라 함은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하며 절대 눈앞의 이익만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제야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은 이세민은 즉시 명령을 철회했다. 
위징은 황제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세민은 그 어느 황제보다 깨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둘의 조화는 당나라, 특히 태종 연간에 이상적인 정치가 빛을 발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황제가 직언 받아들여야 ‘군신 화합’

황제의 납간(納諫)은 신하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주장을 고치는 것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직언을 받아들이는 데는 자신의 체면과 존엄이 걸려 있고, 비난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 본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세민은 왜 납간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수 왕조를 거쳐 온 이세민과 그의 신하들은 모두 수나라의 멸망을 지켜본 목격자들이었다. 그렇게 강대하던 국가가 어떻게 양제(兩帝)의 손에서 무너져 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중에서도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수 양제의 모습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수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를 고쳐야 했다. 정관시대의 군신들은 종종 한자리에 모여 수나라의 멸망을 주제로 토론을 나누곤 했었다. 황제와 신하 모두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교훈을 곱씹었던 것이다. 정관 3년,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신은 함께 난을 다스리고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군주가 충언을 받아들이면 신하는 거리낌 없이 간언을 할 수 있고 이로써 군신이 화합할 수 있다. 예부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자만하면 신하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군주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게 된다. 군주가 나라를 잃으면 신하 역시 살아남을 수 없다. 수 양제가 폭정을 해도 신하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그의 잘못을 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며 우세기(虞世基) 등도 죽임을 당했다. 이는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니 짐과 경들 모두 조심하여 후대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이세민의 정책은 군신일체론이라 일컬어진다. 이세민은 황제가 신하를 예로 대하고, 신하가 조정과 황제를 위해 충성하는 군신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평소 자신의 감정을 자주 드러냈다고 전해지는 이세민은 신하들을 대할 때만큼은 이성적이었다. 그리고 이 군신화합이 후세 리더들의 모범이 된 정관시대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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