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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얻지 못하면 民은 군주를 버린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民은 군주를 버린다”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5.10.2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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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국정교과서 문제로 역사(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가운데 근현대사와 더불어 우리 역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왕조도 재조명되고 있다. 과거 어진 정치를 한 성군과 실정을 한 폭군에 대한 기록에 집중하는 양상을 보였다면 근래에 들어서는 주요 관직을 지낸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 양상에서 볼 때 조선왕조를 설계한 삼봉 정도전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의 3대왕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고 왕위에 등극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정도전을 죄 주는 것은…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이다. 태조가 그렇게 강하고 현명한 임금이었는데도 정도전과 같은 신하가 나왔다. 하물며 후세에 만일 용렬한 임금, 약한 임금이 있을 때 어떤 신하가 정도전을 본받게 된다면 아마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은 일등공신이었지만 동시에 500여 년간 배척당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통했다. 고려왕조를 허물고 조선왕조를 창업했지만 정작 본인의 이름은 잃은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선철들은 ‘부귀로도 음할 수 없고 빈천으로써도 욕되게 할 수 없고 무위로도 굴복할 수 없는 자, 이를 대장부라고 한다’고 말했다. 정도전은 이에 걸 맞는 사내였다. 정을 나눌 줄 알았고 사랑을 즐기는 남자였다. 야인 시절의 그는 유유자적했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흥이 나면 걷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를 읊는 한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혁과 창업을 위해서는 성난 파도와 같은 투사였다.

겸손하고 호방한 이성계에 반해

9년 간의 칩거를 끝내고 움직이기 시작한 정도전은 권력의 중심에서 활약하던 ‘1인자’ 최영(崔瑩) 대신 2인자 이성계를 택한다. 
최영은 중앙귀족 출신이었다. 근왕의 친위대에서 성장했고 공민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다가 신돈에 의해 숙청되기도 했다. 신돈이 사라진 후 정계에 복귀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하지만 최영은 친원파(親元派)였다. 주원장과 싸우고 있는 원나라를 위해 출병하기도 했다. 또한 문헌에는 그를 ‘종신토록 군사를 거느렸지만 면식이 있던 자는 10여 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군중 속에서 병사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신망을 얻은 장수가 아니었다. 야전 무장이라기보다 정치인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아울러 1316년생인 최영은 낡은 왕조를 쇄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갔다. 중앙정계에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이성계는 겸손하면서 호방한 성격으로 사람을 사귀는데 열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이성계의 모습에 반한 정도전은 ‘아득한 세월 한 그루의 소나무/몇만 겹의 청산에서 성장하였네/다른 해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인간은 살다보면 문득 지난일이네’라는 시구로 이성계를 만난 기쁨을 노래했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려면 잇속보다 뱃속이 맞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정도전은 지식인이었지만 말간 얼굴의 책상물림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정도전은 평소 “첫 눈이 내리는 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이런 호방한 기질은 이성계의 배짱과 맞아 떨어졌다.
조선이 개국할 즈음 정도전은 종종 술에 취해 “한 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네. 장량이 고조를 쓴 것 뿐이라네(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라고 말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일종의 파트너로 생각했다. 외형상 고하는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뜻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이성계도 이런 정도전의 성품을 인정하고 그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실로 완벽한 조합이었다. 

리더를 선도한 참모

그들의 첫 만남에서부터 역성혁명(易姓革命)까지는 9년이 걸렸다. 정도전의 목표는 민본개혁이었고, 조선왕조는 그 수단이었다. 개혁이 내용이었고 창업은 형식이었다. 
새로운 세상, 백성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도전의 마음가짐은 성난 파도, 노도와 같았다. 새로운 왕조가 열리자 정도전은 더욱 바빠졌다. 왕조의 틀을 마련하고 체제의 뼈대를 세웠다. 정책, 인사, 재정, 군사, 왕의 교육과 교서작성, 역사 편찬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부분을 거의 망라했다. 새왕조 출범 11일째 되는 날, 정도전은 국가운영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편민사목(便民事目)이란 포고령에서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민본주의와 민생정치를 분명히 했다. 
“하늘이 백성을 내면서 통치자를 세우는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잘 살도록 보살펴주고 편안하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도리를 잘 하고 못 하는 데 따라 민심이 따르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하는 것으로, 하늘의 뜻이 오고 가는 것도 다 여기에 달렸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믿음을 한 몸에 받으면서 본격적인 개혁에 나섰다. 가장 먼저 민생 대책을 살폈고, 국가 시스템을 새롭게 구성해 나갔다. 
민본·위민 사상을 근간으로 인정과 덕치를 수단으로 활용했다.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안민을 목표로 정하고 능력 있는 관리에 의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 갔다. 국가가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해 지식인을 양성하고 시험을 통해 능력과 경쟁력을 갖춘 선비를 선발하도록 했다.
정책결정 과정에서도 여론이 개입할 수 있도록 언로를 개방했다. 경연제도와 구언진서제도가 그것인데 이를 통해 신하와 일반 백성이 국정운영에 개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구성했다. 정도전은 보스의 뒤를 좇는 참모가 아니었다. 그는 리더를 선도했고 지시에 길들여지지 않는 참모였다. 항상 리더보다 더 넓고, 더 크게 생각하려 했다.
정도전의 사상에 민본이 각인된 것은 고려 말, 유배지에서였다.
1375년 원(元)사신의 영접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나주로 귀양을 가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보통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웠다. 책을 읽는 공부가 아닌 일종의 체험학습 형태였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 해야 하나?”

백성들을 스승으로 삼고 겨울은 갖옷 한 벌, 여름은 갈옷 한 벌로 버텼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학자들과 강론하다가 산에 놀러가기도 하고, 농사꾼이나 시골 어르신을 만나 싸릿대를 깔고 앉아 친구처럼 도란도란 담소를 나눴다. 농부들은 순박하고 겉치레가 없었다. 정도전을 따뜻하게 응대한 것은 물론 귀양 온 그에게 초사(草舍)를 지어주고 술과 음식을 제공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가르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유배가 풀린 후 이숭인과 정몽주 등은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지만, 정도전은 일체 쓰지 않았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지혜는 깨달음이고, 지식은 앎이다. 지혜는 통찰로 얻고 지식은 노력으로 얻는다. 지혜가 돈오(頓悟)라면 지식은 점수(漸修)다. 우열은 없지만 선후는 있다. 지혜가 우선이다. 정도전은 농민들의 지혜에 깜짝 놀랐다. 농민들은 무식했지만 세태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귀양을 통해 형성된 생각은 정도전의 정치철학이 됐다. 그는 훗날 조선경국전에서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며 민본사상을 조선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굴지의 경세가 정도전은 그 공적에 걸맞지 않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남은의 첩 집인 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참수되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송현방 정자 한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라며 슬퍼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도전의 사상과 업적이 있었기에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지금 이 순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 긴 역사의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그만한 성공이 또 있을까.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위대한 운명의 순간은 언제나 천재를 원한다”고 말했다. 정도전은 운명의 순간에 등장한 최고의 천재였다. 한 사람의 참모이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넘어, 한 시대를 경영한 경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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