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오너들간 경영권 분란 사태는 가뜩이나 심화되고 있던 반(反)기업정서에 찬물을 끼얹었다. 최근 ‘안하무인’ 재벌 3세를 그린 영화 ‘베테랑’이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것도 우리 사회의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인식을 엿 볼 수 있는 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재산을 가진 이른바 ‘고귀한 사람(Noble Man)’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이 말은, 특히 반기업정서를 진화시키기 위해 애 쓰고 있는 기업의 CEO(최고경영자)들이 꼭 유념해야 할 ‘명심보감’이 되고 있다.
박흥순
팍스 로마나 이끈 노블레스 오블리주
황금기를 구가했던 고대 로마 당시 귀족을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봉사활동과 기부?헌납 등을 통해 명예로움과 자부심을 한껏 만끽했다. 개인 재산을 들여 공공시설을 신축하거나 개보수 한 경우에는 그 귀족의 이름을 따서 건물이름을 지었는데 당시 이는 큰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아피아가도(Via Appia)가 대표적인 예다. 로마의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기원전 312년 건설을 시작한 이 도로는 로마와 그리스, 이집트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 역할을 했다.
로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확고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건국 이후 500여 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참여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줄어든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전쟁에서 희생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귀족들의 솔선수범에 힘입어 로마는 확고한 세계의 맹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지만, 황제에 의한 정치가 시행되고, 도덕적해이가 만연하면서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귀족의 ‘놀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의 기원은 중세 프랑스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 유럽의 귀족 중 가장 특권의식이 강했던 프랑스 귀족들은 고아원?양로원 같은 공공시설물을 건립하고 과시하는 것을 즐겼다. 이 공공시설물 건립비용은 그들이 운영하는 사창가에서 조달했다.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사람들은 귀족들에게 빚을 진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계급이 대부분이었다.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준 뒤 그것을 갚지 못하면 몸을 팔도록 강요했다. 이중적인 자세를 취했던 그들에게 자선사업은 ‘놀이’이자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18세기 들어 프랑스 귀족들은 계몽주의에 심취해 현실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 스스로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이중성과 과시욕에 사로잡힌 모습을 경계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쳤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서양문화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유럽사회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뿌리로 자리매김했다.
‘고귀함’ 없는 귀족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대 로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당연함이 지속됐던 시기의 사회는 번영을 누렸다. 영토 확장은 물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끄는 리더들은 어떤지 생각해 보자. 고위공직자의 청문회가 있는 날이면 그들의 위법행위가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소위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이익에 마비돼 있다. 윤리의식이 결여된 시장에선 중세 프랑스 귀족의 ‘취미생활’과 다름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상(異狀)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지도층들의 도덕적 불감증이 국민들의 피로감을 증가시키고 있다. 우리 귀족들 속에서는 ‘고귀함’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어느 사회나 부유층이나 빈곤층은 존재한다. 다만 빈곤층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방치해서는 좋은 사회 혹은 일류 국가를 논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닥친 위기를 돌파하고 모두가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절실한 ‘고귀함’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지…
#. 전재산 털어 제주도민 먹여 살린 ‘거상 김만덕’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넘친다). 추사 김정희가 거상(巨商) 김만덕을 칭송하면서 남긴 글이다. #. ‘고귀한’ 富의 전형 ‘경주 최 부잣집’400년간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의 내력을 전해온 경주 최 부잣집의 사례는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을 무색케 한다. * 최 부잣집의 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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