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익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
▲ 야율초재 |
소통이 중요한 시대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소통의 부재가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오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리더의 경우 독단적인 판단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 보다 자신을 보좌하는 참모진과 의견을 주고받을 때 더 효과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곤 한다.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근래까지 우리기업들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 리더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됐다. 기업이 효율성을 중시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 중 한사람인 칭기즈 칸은 신하들과 많은 사안을 이야기하고, 그 의견을 존중했다. 약 800년 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소통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 칸이 특히 신뢰한 인물로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있다.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 사후에도 30여 년 동안 대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중국 역사에서 원나라는 이민족의 국가로 여겨지지만 야율초재는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흥순
금나라 사람인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을 만나기 전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매일 산속에 숨어서 학문에만 몰두하던 그는 칭기즈 칸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름에 응했다. 칭기즈 칸은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요나라의 후손인 것을 알고 “금과 요는 본디 원수지간이다. 내가 너를 위해 원한을 씻어주겠다”고 말하며 야율초재의 관심을 끌려했다.
야율초재는 “제 조부(祖父)가 이미 금나라에서 벼슬을 했습니다. 어떻게 군주를 원수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뜻밖의 대답을 내놨다. 이에 칭기즈 칸은 매우 만족하면서 야율초재의 의기를 높이 사 신하로 맞이한다. 이후 칭기즈 칸은 야율초재를 몽골어로 긴 수염이라는 뜻의 ‘오도살합리’라고 부르며 매우 살갑게 대한다.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대부분의 사안을 야율초재와 상의하곤 했던 칭기즈 칸의 기존 신하들 사이에서는 ‘굴러온 돌’이었다.
대제국 기틀 다진 ‘굴러온 돌’
그런 그를 겨냥해 서하사람 상팔근은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 때에 야율초재 같은 문인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야율초재도 지지 않았다. “활은 활을 만드는 기술자가 있어야 합니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활 만드는 장인은 필요 없습니까”라며 쏘아붙였다. 이런 야율초재의 말에 칭기즈 칸은 감탄하면서 더욱 그를 중시하게 됐다. 훗날 칭기즈 칸은 아들 오고타이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앞으로 나랏일과 군대일은 모두 그에게 맡겨 처리해라”고 명했다.
원 태조 테무친 ‘칭기즈 칸’은 사실 무자비한 정복자였다. 당시의 몽골 군대는 전쟁을 통해 점령한 곳의 주민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곤 했다. 유목민족인 몽골은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토지나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배가 고프거나 무엇이 필요하면 약탈하면 되고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불을 지르고 초토화 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면 됐다. 여기에는 어떤 미련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어차피 잠시 머물다가 또 이동할 것이고 또 배가 고프면 또 다시 약탈을 하면 됐다. 물자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개념도 필요 없었다. 이는 세계 최강의 기동력과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힘을 줬다.
그러나 야율초재는 “정벌보다 통치에 목적을 둬야 한다”고 칭기즈 칸에 충언했다. 금나라의 변경(변경)을 공격할 당시 야율초재는 말 위에서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지만, 통치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라를 창업하기는 쉬우나 그것을 수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수성을 하기 위해서는 물자와 그것을 생산할 기술자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죽이고 불태운다면 우리는 이 싸움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서역과 서하원정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황무지를 얻기 위해 피를 흘려 싸운 것 입니까? 그 황무지를 이제 누구에게 물려줄 생각입니까”라며 칭기즈 칸을 설득했다.
야율초재의 이 말은 칭기즈 칸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까지의 전쟁이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칭기즈 칸은 이후 학살과 초토화를 금지시켰다. 그동안 행해지던 관습을 중지한 후 칭기즈 칸은 서서히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대제국 원나라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목숨 걸고 충언하다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 사후에도 그의 아들 ‘원 태종’ 오고타이 칸의 곁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군주를 인도했다. 칭기즈 칸에 의해 발탁된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 대에 이르러 그 재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었다. 오고타이 칸도 야율초재를 믿고 그 능력과 혜안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 오고타이칸 즉위식 |
몽고의 풍습에 따라 칭기즈 칸의 후계자로 지목된 삼남(三男) 오고타이 칸은 호탕하고 통이 컸다. 주변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성격은 때로 장점이 됐지만 지나치게 음주가무를 자주 즐기는 문제도 낳았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의 이런 점을 개선하기 위해 그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술은 철기를 부식시킵니다. 하물며 인간의 오장육부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처음에는 야율초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던 오고타이 칸은 얼마 후, 말의 뜻을 깨닫고 자신은 물론 모든 신료들에게 술을 석 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권고했다.
칭기즈 칸 대에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 한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치국에 힘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고타이 칸은 야율초재에게 “아버지는 대제국을 남겨주셨고 나는 그것을 개혁하고자 한다. 그대는 좋은 방안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야율초재는 “하나의 이익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라고 답했다.
오고타이 칸과 야율초재는 군신간의 두터운 정을 나눴고, 원나라를 건전하게 발전시켰다. 1236년에는 오고타이 칸이 궁실의 미녀를 선발해 후궁으로 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야율초재는 지금도 궁안에 미녀가 넘치는데 또 여인을 선발한다면 백성들의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이라면서 명령의 집행을 거부했다. 이에 오고타이 칸은 크게 화를 냈지만 잠시 생각하니 야율초재의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오고타이 칸은 이후에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법률, 제도 등을 정비하고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자 기득권층은 불만에 휩싸였다. 재물 약탈은 기본이고 처녀를 겁탈하는가 하면 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수구세력들은 온갖 비방과 유언비어를 퍼뜨려 야율초재를 모함했다. 한 번은 오고타이 칸이 총애하는 양유가 살인범을 감싸다가 야율초재에게 심문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양유는 오고타이 칸 앞에서 야율초재를 비방했고 그 말을 믿은 오고타이 칸은 야율초재를 잡아들이게 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오고타이 칸은 야율초재를 석방하라 명했다.
이에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에게 충고했다. “신은 조정의 대신으로 폐하를 보좌하여 국정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잡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저에게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문무백관 앞에서 저의 죄가 무엇인지 선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저를 지금 석방하라고 하시니 이는 저에게 죄가 없다는 뜻 아닙니까. 이렇게 문제를 가벼이 뒤집는 것은 어린아이들 장난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나라의 일을 이렇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황제의 권위를 넘보는 범상(犯上)의 죄는 죽음뿐이다. 하지만 오고타이 칸은 우매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가 귀한 황제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수를 전혀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문제를 넘겼다. 야율초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상벌, 명분, 녹봉, 공신, 농업, 양잠 등 10가지 대책을 건의해 오고타이 칸의 허락을 얻어 냈다.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처럼 야율초재가 군주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발언을 할 때면 지배층은 조바심을 내고 그를 모함했다. 그때마다 야율초재는 모략을 활용해 때로는 강경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대응했다. 특히 자신과 군주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가장 우선시 했다. 이 때문에 30년 동안 별다른 충돌 없이 진심어린 충언을 계속할 수 있었다.
“건의가 합당하면 당연히 시행…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안된다”
야율초재는 금나라에서 태어났고 요(遼)나라 왕실의 후예였다. 하지만 그는 몽골제국을 사랑했고 충성을 다했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군주와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오고타이 칸이 세상을 떠난 후 몽골의 권력은 내마진후(乃馬眞后)의 손에 들어간다. 내마진후는 오고타이 칸의 아내로 많은 뇌물을 바친 ‘오도랄합만(奧都剌合蠻)’이라는 자를 중용했다. 내마진후는 옥새가 찍힌 백지를 오도랄합만에게 건네며 신료들의 관직을 마음대로 적어 임용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일을 알게 된 야율초재는 내마진후 앞에서 “지금 이 천하는 황제들의 천하입니다. 대신의 임용에는 엄연히 조정의 정해진 법규가 있습니다. 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조정은 금새 문란해질 것입니다. 이런 명령은 받들 수 없습니다”라며 반발했다.
▲ 야율초재의 사당이 있는 문창원 |
내마진후는 백지를 다시 회수하고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도랄합만이 제기한 모든 건의는 영사(令史)가 기록해 두었다가 반드시 실행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 손을 잘라버리겠다”라는 명을 내렸다. 이번에도 야율초재는 “건의가 합당하면 당연히 시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안됩니다. 손 잘리는 것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라며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자 내마진후는 점점 야율초재를 멀리했다. 결국 내마진 3년, 그는 울분 속에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야율초재는 세 명의 황제를 보필하면서 제도와 문화면에서 낙후된 몽골을 다듬었고, 중국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게 했다. 야율초재는 리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잘못됐을 때 서슴없이 말머리를 돌리도록 했다. 그는 모략가였지만 충성스러웠고, 동시에 지혜로웠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비열하고 기회주의적인 이미지의 모략가가 아니라 도덕과 양심 등 필요한 덕목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물게 뛰어난 모략가였다.
야율초재의 8가지 개혁 |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