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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9 11:00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어느 것 하나 잃어지지 않게 하라”
“어느 것 하나 잃어지지 않게 하라”
  • 인사이트코리아
  • 승인 2015.08.31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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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의 Communication&Coach]예수(Jesus)를 통해 바라본 ‘이상적 커뮤니케이션’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해 많은 문제와 선택의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 그 문제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피할 수 조차 없는 것들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도망가 버리고 싶은 현실에 놓여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도망갈 수 조차 없는 현실 앞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그런 현실 속에 있고, 또 앞으로 그런 상황 가운데 놓여지게 된다면 이는 그저 묵과하고 넘어가야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늘 코 앞까지 닥쳐오는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성경에 기재된 예수를 통해 ‘이상적 커뮤니케이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성경에 기재된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을 보면 예수의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대해 잘 기술되어 있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마을사람들이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는 상황이다. 이 때, 종교기득권자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데려다가 그 상황을 해결해 보라는 시험을 준다. 종교기득권자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단 한가지다. 율법을 내세워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었는데 예수가 나타나 기독교의 본질이 흐려졌음을 비판하고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무엇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주장했다. 계급을 파괴하고 율법을 거스르고 하찮은 고아나 과부를 존중해 주는 예수의 행동은 몹시 그들의 조직적 권력에 방해가 되었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를 없앨 함정을 만들어 처단하고 싶었다. 

인간 존중·생명 존중…

지금 예수가 처한 상황은 그 어떤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보다도 더 복잡하고 긴박한 상황임이 분명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예수의 한 행동에 따라서 한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고,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며, 지금까지 설교했던 모든 것 뿐 아니라 앞으로의 설교를 통한 모든 활동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적대자는 간음한 한명의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를 고소할 함정을 파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명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될 때 크게 두 가지로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선택과 결정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최악의 것을 피하든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가 선택해야 할 두 가지 것들은 모두 최악의 것들이었다. 
만약 예수가 끌려온 여자를 살려주라고 말한다면,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어기는 자가 되고 만다. 그 또한 살아남을 수 없다. 만약 여자를 율법대로 죽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로마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형의 판결과 집행권이 로마당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은 로마에 저항하는 것이고 백성을 선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예수가 가르쳤던 자비와 사랑의 메시지는 모두 거짓이 되고 만다. 어떤 선택도, 어떠한 결정도 최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예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성경의 요한복음에 보면, 그 순간 예수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땅에 쓰기 시작했다. 요한복음서에는 예수가 총 3번, 땅에 글씨를 쓴다.

①처음 땅에 쓴 것은 ‘이름’, 당신의 이름입니다!

예수가 땅에 처음으로 쓴 것은 그녀의 ‘이름’이다. 모든 이들의 무관심 속에 내동댕이 처진 여자, 군중 가운데 서 있는 여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간음에 동참했던 남자는 아무런 형벌도 없이 떳떳히 살아가지만 그녀는 공정하지 못한 형벌 속에 있다. 예수가 땅에 글을 써서 알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의 존재가치’ 였다. 간음한 여인은 모든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하나의 더러운 존재였던 여인에게 예수는 그 여인의 이름을 찾아주었다. 땅에 쓴 그 이름은 그저 이름이 아닌 그 시대에는 가장 존중해 주는 행위였다.
우리는 어쩌면 가짜이름과 신분을 쫓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늘 자신의 이익과 목적달성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커뮤니케이션은 전달자와 수신자 중 어느 한쪽이 가치를 상실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쪽이 이익이나 자신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상호간의 ‘존재가치’를 존중해주는 것이다. 이런 본질을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실행될 때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실현될 것이다.

②두 번째 땅에 쓴 것은 ‘어느 것 하나 잃어지지 않게 하라’입니다!

예수가 땅에 두 번째로 쓴 글씨는 ‘어느 것 하나도 잃어지지 않게 하라’이다. 긴박한 순간, 언제 돌무더기가 날아올지 모르는 순간에 예수는 땅에 이 글씨를 쓴다. 이런 법칙은 S-R이론으로 비추어볼 수 있다. 바로 ‘자극-반응’ 법칙이다. 자극이 오면 반응이 따른다. 그런데 한 가지 그 사이에 중요하게 인식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서는 매우 짧은 순간에서도 창조와 소멸이 일어난다. 예수는 ‘OR’이 아니라 ‘AND’를 선택한 것이다. 예수는 형벌을 받을 한 여인 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폭도들까지도 잃지 않기를 원했다. 예수는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 여인도, 그 무리들도, 자신의 사명도 잃어지지 않는 방법을 원했다. 그래서 예수는 서서 말한다. “죄없는 자가 돌로 쳐라!”
많은 관계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특히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이렇게 어느 것 하나 잃어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많다. 왜냐하면 비즈니스는 경쟁이고, 전쟁이며, 쟁취의 관계가 주로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어느 것 하나 잃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에 중점을 두었을 때 반드시 그에 부합된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하다. 
익숙했던 경쟁, 전쟁, 쟁취의 관계 커뮤니케이션을 탈피하고 이런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는데는 생각보다 진통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조직을 위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잃어지지 않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실현임을 숙지해야 한다. 현재의 세계적인 불경기와 불황 속에서 이런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실현은 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③마지막으로 땅에 쓴 것은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입니다!

예수가 “죄없는 자가 돌로 쳐라!”로 말한 뒤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쓴다. 자극-반응 사이의 공간, 이번에는 기다림의 공간이다. 예수가 마지막으로 땅에 글을 썼을 때, 어떤 소리가 들려 왔다. “툭, 툭…” 돌이 떨어지는 소리다. 사람들이 양심의 깨달음을 받고 돌아가는 발자국 소리다. 사람들이 변화되었다. 자진해서 돌아갔다. 그들도 여인도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다. 그들을 변화되게 한 것은 예수의 마지막 글씨였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우리는 살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꼭 있다.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에게 상처를 준 경우다. 가족관계에서도, 직장관계에서도, 다양한 관계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대부분 상처를 받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은 분노도, 강하게 보이고 것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 당장은 내 속이 후련한 것 같지만 점점 그렇게 내가 행동했던 것들이 나를 더 괴롭게 한다. 그리고 상대방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 여전히 독한 말을 내뱉고, 나에게 함부로 하여 관계는 호전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날카로운 지적이나 논리적인 일침이 아닌 용서의 마음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다. 의외로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결국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과거의 상황을 접어버리는 용서와 사랑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말처럼 쉬우면 참 좋겠지만 매 순간 순간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닥쳐오는 괴로움은 그런 용서와 사랑의 용기를 실천하기가 버겁기 일쑤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의 사건은 큰 용서의 사건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용서와 사랑의 본이 되었다.
인간관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받는 상처와 괴로움은 하루에도 몇 번, 몇 십번 닥쳐온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오류들은 발생하고 또 그 오류들을 해결하느라 또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러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 희미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상적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방을 의미있는 존재,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 어느 한쪽도 잃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되며, 커뮤니케이션의 결과가 목적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용기와 용서하는 용기를 가지고자 할 때 실현될 수 있다. 

김혜영 커뮤니케이션 코치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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