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仁) · 의(義) · 예(禮) · 지(知) · 용(勇)으로 본 두산그룹 3세 경영인들
인(仁) · 의(義) · 예(禮) · 지(知) · 용(勇)으로 본 두산그룹 3세 경영인들
  • 인사이트코리아
  • 승인 2015.06.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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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100년에 기업 두산에 길을 묻다.-3

두산그룹 박두병 초대회장의 아들들인 두산가 3대(代)는 한자 ‘容’을 돌림자로 쓴다. 용곤-용오-용성-용현-용만-용욱이 그들이다. 이중 막내인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54))은 일찌감치 홀로서기에 나서 독자적인 기업을 경영해 왔기 때문에 현재 두산그룹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상 박용만 현 두산그룹 회장을 ‘3대’의 마지막 회장으로 보는 견해가 두산 안팎에서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30년 이상 이어오고 있는 이들 두산 3세 형제경영의 특징이 무엇이고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각자의 경영스타일을 통해 들여다 봤다. 특히 인(仁),의(義),예(禮),지(知),용(勇)으로 일컬어지는 동양적인 리더의 덕목 중 다섯 형제는 어디에 해당하는 지 비교 분석해 봤다.
 

 ‘義將’ 박용곤 명예회장
 ‘신뢰의 두산’ 이미지 쌓아 ‘페놀’ 위기 조기 극복

▲ 박용곤 명예회장

박용곤(81) 현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5형제 중 맏형이다.

그가 회장에 취임하기 전의 두산은 그룹 안팎으로 악재에 처해 있었다. 1979년 10.26사태, 12.12군사반란과 1980년 5.18광주민주화항쟁 등 정치,사회적 격동의 시기에 국내 모든 기업들의 투자의욕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두산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업 후 최대의 시련이라 할 정도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주력계열사인 동양맥주는 1980년 28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 와중에 두산그룹 계열 합동통신사는 신군부정권에 의해 해체돼 종간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위기에 두산그룹은 박용곤 회장을 중심으로 한데 뭉쳤다. 이때 박 전 회장은 그의 경영 방침 중 첫째로 “모든 사원이 일생을 걸어 후회가 없는 직장이 되도록 하겠다”면서 두산그룹 모든 임직원들을 하나로 포용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박 전 회장의 이런 의지는 직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구심점 같은 역할을 했고 직원들은 이 시기에 두산을 성실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부각시키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자산 4500억원, 매출 5090억원의 그룹을 자산 6조723억원, 매출 5조7000억원의 거대그룹으로 도약시켰다.
이렇듯 ‘의(義)’로 똘똘 뭉친 박용곤 시대의 두산그룹은 거침없었다. 주력사업인 맥주시장이 1980년대 중반 불황을 맞게 되자 생맥주로 난국을 헤쳐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자체 기술 개발과 함께 해외 맥주 제조사들과 기술제휴를 맺으면서 상황을 호전시켜 나갔다. 때마침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후원업체로 지정돼 세계 무대로 도약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면서 두산그룹은 성장세를 이어 나갔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용곤 전 회장의 두산그룹 신화는 예기치 않은 암초를 만나 잠시 멈칫하게 된다. 1991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낙동강 페놀 유출사고’가 그것. 이 사건으로 박 전 회장은 잠시 경영일선을 물러나게 된다. 훗날 다시 경영에 복귀하기까지 전문경영인 출신 정수창 회장이 경영공백을 메웠다. 박용곤 회장이 복귀한 두산그룹은 숨고르기를 마친 달리기 선수처럼 다시 힘차게 뛰었다.
이후 박용곤 회장은 두산에 변치않는 믿음을 보내준 국민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환경경영에 박차를 가했다. 기업내부에서 쌓은 의(義)를 넘어 사회구성원들의 믿음에 대한 의(義)를 실현해 나간 셈이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던 두산그룹 이미지는 적극적인 경영진의 노력으로 차츰 상황이 호전됐다. 페놀사고를 기점으로 두산그룹은 계열사 사장을 위원으로 하는 그룹 환경위원회를 발족해 운영했으며, 매년 환경친화적인 경영에 대한 예산을 늘려가며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데 집중했다.
이렇듯 성공가도를 달리던 두산그룹은 ‘페놀사건’으로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박용곤 전 회장은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특히 사건 발생 3년 후인 1994년에는 전체 26개 사업장 중 61.5%에 달하는 16개 사업장이 환경관리 모범업체로 지정되는 등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仁將’ 박용오 전 회장
“기업은 식물이고, 현장은 뿌리다”

▲ 박용오 전 회장

故 박용오(1937~2009) 전 두산그룹 회장은 IMF 외환위기 때 두산그룹을 지켜낸 ‘어진 총수’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시기에 성공적인 사업구조조정을 시행, 두산그룹의 체질을 강하게 했다. 아직까지 기업구조조정의 모범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실천형 리더의 표본이었던 그는 기업의 뿌리는 현장이고, 생산현장, 즉업무현장이 튼튼해야 모든 경영활동에 탈이 생기지 않는다는 마인드로 그룹을 이끌었다. 특히 현장직원들에게는 허울없이 대하면서 仁將의 모습을 보여줬다.
생전에 그와 함께 일했던 주변의 많은 임직원들은 박 전 회장을 가리켜 ‘활달한 성격의 어진 사람’이라 표현들 한다. 프로야구 구단주 출신으로서 한국야구위원회(KBO) 회장직도 연임하는 등 대외활동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활달한 성품 그대로였다.
그룹 총수로서 우두커니 사무실에 앉아 결재서류에 도장 찍는 일 보다는 생산현장을 찾아 다니며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현장에서 고생하는 직원들과 함께 생맥주집에 앉아 정기적인 모임을 가질 정도로 소통과 현장을 중시했다.
그는 “기업은 식물과 같다. 식물은 뿌리가 중요한데, 기업이라는 식물에 있어 그 뿌리는 다름 아닌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취임 100일 동안 100여개 사업장을 찾아 109건의 애로사항을 접수했으며 취임이후 1년 동안 전국 150개 사업장을 2회씩 방문하기도 했다.
‘현장’이라는 단어는 ‘노동조합’이라는 단어와도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현장을 좋아한 박 전 회장은 노사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당시 중동지역 플랜트 건설현장을 찾아간 박 전 회장은 이역만리 타국의 노사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신 노사문화 조성을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현장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도 비판을 가하기 보단 늘 어진(仁) 마음으로 폭넓게 의견을 수용했고, 직원들의 복지뿐만 아니라 내부결속과 자기계발 지원 등 전 분야에 걸쳐 현장과 소통하고 협력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자 힘썼다.
비록 박 전 회장은 굴곡진 말년을 살았지만 두산그룹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그는 조부와 부친의 경영이념 중 하나인 인화(人和)를 실현하기 위해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 어진 리더였다.


‘勇將’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매사 주관 뚜렷…‘미스터 쓴 소리’ ‘구조조정의 달인’

▲ 박용성 회장

현재 두산중공업 회장 겸 중앙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박용성(73) 전 두산그룹 회장은 1988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포함해 두산그룹의 요직을 두루 섭렵했던 ‘勇將’으로 평가된다. 경영에 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한 번 맡은 일은 끝을 볼 때 까지 매달리는 ‘워크홀릭’이다. 잠도 안자고 일에 몰두하는 그의 성격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그의 좌우명과 딱 맞아 떨어진다.
박 전 회장은 ‘용감한 리더’ 답게 거침없는 입담으로도 유명하다. 2005년 두산그룹을 강타한 ‘형제의 난’ 이후 그가 발언하는 빈도는 현저하게 줄어 들었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속을 시원하게 만드는 그의 어록은 한 때 세간의 관심사였다.

“문어발식 경영이든 지네발식 경영이든 상관없다. 단지 핵심역량을 가지고 있느냐가 관건인데, 핵심역량이 있으면 문어발보다 지네발이 더 낫다”(2001년 6월 관훈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노는 제도를 국제기준으로 하려면 일하는 제도 역시 국제기준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2002년 2월 노동부장관 초청 간담회에서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관련해).
“첨단 병을 앓고 있는 한국기업들은 들쥐 떼 같다. 어떤 사업이 좋다고 하면 충분한 검토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든다”(2002년 3월 포스코 초청 특강에서)
“돈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런데 쓰는데 익숙한 정치인과 관료들은 항상 쓸 궁리만 한다”(2002년 12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처럼 박 전 회장은 두산그룹 3세 다섯 형제 가운데 가장 거침이 없다. 그야말로 용장(勇將)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성품이다. 이 때문에 호전적인 경영방식을 펼쳤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실제 박 전 회장의 경영방식은 알짜배기를 찾아내는 내실 쪽에 더 가까웠다.
그는 두산그룹 회장 재임 당시 기업의 핵심역량에 대해 그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룹의 핵심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두팔을 걷어 부쳤다. 박 전 회장이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하기 전 두산중공업 회장으로 재임했을 당시 방만하게 운영됐던 조직에 핵심역량이라는 활력을 불어넣어 성공적인 사업체제변화를 가져온 사례가 있다.
당시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은 공기업의 기업문화가 그렇듯 방만하고 태만하게 운영돼 왔다. 이런 조직에 산업의 기초소재인 주단부터 원자력, 화력 등 발전설비, 해수 담수화 플랜트, 환경설비, 운반 하역설비, 화공 설비 등 산업설비 등을 제작해 국내외 플랜트 시장에 공급하는 등 전사적 차원의 핵심역량을 확보해 나갔다. 무분별한 확장이 아닌 내실에 충실을 기하는 경영을 펼쳤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던 것이 해수 담수화 사업(MSF타입)으로 세계시장점유율 30% 이상으로 1위를 기록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내실있는 경영을 펼쳤던 박 전 회장이 용장(勇將)이라 불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두산그룹이 1995년 말부터 시행한 구조조정의 ‘행동대장’격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선친이 금지옥엽(金枝玉葉) 키워온 동양맥주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그의 결단력은 실로 대단했다. 박 전 회장은 두산그룹 안팎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두산그룹의 방대해진 조직규모를 과감하게 통합축소했다. 또, 그는 대한상의 회장 시절 대한상공회의소 구조에도 메스를 댔다. 다른 인물들과 차별화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용감함과 결단력은 그에게 ‘구조조정의 달인’이라는 칭호를 안겨줬다.

‘禮將’ 박용현 연강재단 이사장
“두산의 ‘조용한 변화’ 이끈 젠틀맨”

▲ 박용현 이사장

자고로 신사는 깔끔함을 예(禮)로 삼았다. 마주하는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도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춰 박용현(70) 전 두산그룹 회장은 다섯 형제 가운데 가장 예(禮)를 아는 ‘깔끔한 신사’로 정평이 나 있다.
박 전 회장은 지난 2001년 맞춤양복협회가 선정한 ‘베스트드레서’에 뽑혔을 정도로 뛰어난 패션 감각을 자랑한다. 박용현 전 회장을 신사라 부르는 이유는 비단 패션감각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경영방식도 옷차림만큼이나 깔끔함을 자랑했다.
박 전 회장은 재계 인사치고는 독특한 이력을 자랑한다. 그는 평생을 ‘병원밥’을 먹으며 성장한 외과교수이자 서울대학교병원장 출신이다. 재계에 발을 들이고 기업경영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한지 2년 만에 그는 재계순위 10위의 두산그룹 총수자리에 올랐다. 의사였던 그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였을까?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던 인사로 그룹 외부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경영인으로 지낸 시간이 너무 짧아 실무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렸다. 2년 남짓한 짧은 기간동안 두산건설에서 1,1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다가 26개 계열사, 3만5000여 명의 그룹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를 감당할 역량이 되겠느냐는 지적이었다.
덧붙여, ‘형제의 난’으로 인해 용오-용성-용만 세 형제가 나란히 기소돼 경영공백이 우려 됐기 때문에 임시방편적인 성향의 인사라는 말도 인구(人口)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정작 두산 측은 ‘조부 故박승직과 선친 故박두병 전 회장으로부터 경영을 배운 타고난 경영인’으로 일컬었다. 특히 그의 형인 박용성 전 회장은 “동생은 의사지만 타고난 장사꾼”이라며 박용현 회장에게 믿음을 실어 줬다.
그러나 2008년 당시 세계경제를 휩쓴 유럽발 글로벌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사업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두산그룹은 박 회장이 수장에 오른 이후 최악의 성적을 냈다. (주)두산을 비롯해 두산건설, 두산엔진,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중공업 등 5개 주력 상장사의 실적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매출은 10% 늘어났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2011년 기준으로 봤을 때 전년도인 2010년과 비교해 각각 29%, 66% 급락했다.
워낙 심한 외풍을 맞았기 때문에 경영상 드러난 수치는 감소세를 면치 못했지만 박 전 회장은 두산에 ‘문화’와 ‘상생’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줬다. 주변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으며 취임한 박용현 전 회장은 취임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두산의 조용한 변화를 이끌겠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그 말대로 그가 취임한 후 두산은 조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협력업체와 상생하는 두산을 만들기 위해 박 전 회장은 ‘협력업체와 동반성장’을 강조하며 각 계열사에 상생협력을 주문했고, 진정한 글로벌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사회공헌과 문화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두산그룹 계열사 사장단을 불러놓고 이같은 주문을 하는가 하면, 두산아트센터를 탈바꿈 시키는 등의 활동을 해 나갔다.
그는 또 그룹을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서 조부 박승직 창업주가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신사의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경영상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 생길 경우 이사회를 소집해 의사를 결정, 실패의 가능성을 낮추기도 했다. 이처럼 박용현 전 회장은 다른 형제들보다 깔끔하고 조용하게 그룹을 이끌어 나갔다.


‘知將’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형 만한 아우 없다’ 입증한 전략통

▲ 박용만 회장

 ‘형 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다. 경험을 많이 쌓은 형이 경험이 적은 아우보다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두산家의 경우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박용만(59) 現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 1995년 두산그룹 기획조정실 부사장시절부터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고 그 역량을 뽐냈다.
두산그룹 구조조정 당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박용만이 작전을 세우고 박용오가 결재하며 박용성이 후원한다”. 이처럼 박 회장은 미래전략에 관해 탁월한 지식과 안목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다시 말해 그는 ‘형 만한 아우’인 셈이다.
박 회장은 다섯 형제 가운데 가장 멀리 내다보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빈틈이 없고 치밀하다. 작은 일 하나에도 신중한 생각을 하고 그 일이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판단한 후 행동한다. 이런 그의 습관은 20여년 전부터 그룹경영현장에서 배워온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을 배움에 있어 처음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스펀지 같은 유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리더의 자질이 있다고 말한다.
“처음 스타트라인에 섰을 때 조그만 지식의 차이는 큰 차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스펀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죠. 자기가 단순히 반복적인 일을 하더라도 그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왜 해야 되며, 내가 한 업무 다음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그것이 회사의 더 큰 업무로 어떻게 연결이 되고, 이것은 어떠한 수익성과 연결되는지…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식을 빨아들이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1년이 지나면 뭘 아는 게 없다가 뭘 좀 아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러면 금방 차이가 납니다. 리더가 될 사람들은…”
두산건설, 두산음료, 두산그룹 기획조정실, 오비맥주, 두산인프라코어 등 두산의 거의 모든 분야의 경영현장을 돌아보며 지식을 빨아들인 브레인 박 회장은 지난 2012년 두산그룹의 총수자리에 올랐다. 박 회장은 취임부터 세 가지를 강조했다. 바로 미래와 소통 그리고 사람이다.
박용만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두산의 미래 성장동력을 강조했다. 경기침체로 인한 방어적인 경영에 멈춰있지 말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전략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중장기적인 방안을 강구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 그는 트위터를 통한 13만명에 달하는 팔로워(Follower)와 허울 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수십 겹의 장막에 가려진 재벌그룹 총수의 모습이 아니라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 사회구성원들과 ‘소통하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박 회장은 재계에서 인재경영의 달인으로 유명하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두산 광고 카피를 직접 쓸 정도로 인재와 미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하기 위해 매년 기업설명회에 직접 참석해 대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가 하면, 해외 대학 MBA졸업생 면접에 직접 참여할 정도의 열정을 보인다.
이렇듯 사람과 미래, 소통을 좋아하는 박용만 회장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은 바로 책 읽기다. 틈틈이 책을 읽는 박 회장의 독서량은 매달 다른데 많으면 한 달에 열 권, 적으면 두 권 정도라고 한다. 재계순위 10위권, 4만여 명의 직원을 책임지는 그룹총수이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겸하고 있는 그가 많은 시간을 들여가면서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 회장은 ‘스펀지론’에서 알 수 있듯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 중 하나다. 때문에 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을 즐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살아있는 지식창고 박용만 회장의 두산은 현재진행형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와 두산이 앞으로 어떤 스토리를 써 나갈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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