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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독창적인 서체 - 추사체(秋史體)
우리의 독창적인 서체 - 추사체(秋史體)
  • 인사이트코리아
  • 승인 2015.05.27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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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안의 ‘CEO 후마니타스(Humanitas)’]

‘후덕재물(厚德載物 : 덕을 두텁게 하여 만물을 포용한다).’

이는 지난 3월 중국을 방문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셀 오바마(Michelle Obama)에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의 부인인 펑이위안(彭麗媛)이 서예로 써준 글이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영부인들의 소프트 외교에 서예가 한 몫을 했다.
우리는 서예의 원조는 중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서체(calligraphy)의 원조는 아랍어이다. 아랍어 글 자체가 예술이고, 모든 이슬람 예술의 근간이 된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 유적은 기하학적인 대조를 가진 작품들이 많다.
물론 서예라는 장르를 세계에 알린 것은 중국이다. 그래서 서예는 중국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흔히들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비유해 ‘왕희지(王羲之) 필법으로 일필휘지하여 써 내려갔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중국 서예는 왕희지가 확립한 후 구양수, 조맹부, 안진경 등 많은 서예가들이 발전시켰다. 중국에서 시작된 글씨체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새로운 서체로도 발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서예에 대해서 이규상의 ‘서가록(書家錄)’에 잘 기술되어 있다.
한국 서예는 신라 김생(金生)으로부터 고려 탄연(坦然) 스님으로, 그리고 조선조의 안평대군과 한석봉, 조선 후기의 추사 김정희까지 우리 서예의 맥을 잇는 계보이다.
신라 김생이 천지자연의 조화에 짝하여, 명나라 어사 고양겸이 평하기를 ‘욍희지나 종요의 서법이 아니면서 도리어 종요나 왕희지보다도 뛰어난 점이 있다’고 하였다.
안평대군이 서가 가운데 우뚝 모습을 드러냈는데, 정신이 표일하고 획이 굳세고 살이 붙은 것을 보면 팔뚝을 내리고 쓴 것이 아닌 듯싶다. 서체는 송설체(송나라 조맹부의 글씨체)이다.
석봉 한호(韓濩)에 이르러 서체가 비로소 종요와 왕희지를 본받으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별법을 보완하여 원법(圓法)이 적고 방법이 많아 정제되어 굳세고 아름다웠으니 ‘한체(韓體)’라 이름 하였다.
대부분 중국의 서체를 모방해 왔다. 하지만 한국 서예를 논할 때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은 독자적인 ‘추사체’라는 우리 고유의 글씨체를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대부분 중국 서체를 모방하였으나, 고유의 서체를 개발한 사람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광사(李匡師)의 동국진체(東國眞體)이고, 또 하나는 그 유명한 김정희의 추사체이다. 추사체는 중국으로 역 수출되어 중국 서예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추사에 대한 연구는 많은 학자들이 해왔고 지금도 꾸준히 연구하는 대상이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정조 시대의 정치인이자 문인, 서예가 그리고 금석학자이다.
왕희지의 해서와 행서는 종이가 공급되고 글씨가 중요한 소통수단으로 유통되기 시작하던 때에 발전한 글씨다. 글씨의 수요가 급증하고 글씨 쓰는 속도가 빨라졌다. 서체는 매끄러워지고 결구는 물 흐르듯 흘러 내렸다.
그는 왕희지를 넘어서는 등석여의 전서(篆書)를 연구하여 창의적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등석여의 전서혁명이 일어난 직후, 왕희지에게서 채우지 못한 갈증을 풀어주는 글씨의 신천지는 예서였다. 서한시대의 예서(隸書)는 전서의 필의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를 ‘고예(古隸)’라 부르고, 동한의 예서는 ‘팔분(八分)’이라고 부른다. 팔분은 전서의 기운이 20%이고 나머지 80%는 새로운 글씨를 의미한다. 파세(波勢), 갈고리, 파임이 강조되기 시작한 글씨로 변화감이 뚜렷했다.
추사에 대한 연구서로는 ‘나의 문화 탐방기’를 쓴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완당평전(학고재: 2002)’을 비롯해 ‘국역완당평전(민족문화추진회)’ 등 많은 저술과 논문 그리고 학예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전문가의 추사 연구가 아니라 일반인으로 추사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상국의  ‘추사에 미치다 (푸른역사: 2008)’를 소개하고자 한다. 제목이 말하듯 거의 추사에 미쳐버린 사람이 쓴 것이다. 추사의 작품도 소개를 했지만 기자 출신답게 취재를 통해 인간 김정희의 삶과 열정을 편력했다. 많은 자료와 출처 그리고 진위에 대한 냉정한 평가 등 일반인들이 쉽게 추사 김정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또 한 권은 김종헌의 ‘추사를 넘어(푸른역사-2007)’는 전문가의 학구적인 책이 아니라 일반인이 본 추사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내용이 부실하거나 인기가 없는 책은 아니다.
비단 추사뿐 아니라 정판교의 작품 등 아주 희귀한 고서 자료들을 총 망라해 만든 책이다. 2007년 초판 발행 후 2011년 7쇄를 한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김종헌은 좀 특이한 이력을 소유자이다. 기업체 임원(남영 비비안의 대표이사)으로 일하다 은퇴 후 카페를 경영하였다. 아내의 제빵 기술과 본인의 책에 대한 사랑을 접목시킨 것으로 그때의 경험을 책으로 내었는데, ‘Peace of Mind- 빵 굽는 아내와 CEO남편의 전원카페(동아일보사: 2004)’이다.
하지만 본인이 관심 분야는 서예로 고서를 모으는 것이고 현재도 약 1만 여권의 고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카페에 사설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고서에 관심이 많은 관계로 자연스레 추사 선생의 작품을 많이 접하고 연구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추사 김정희는 시, 서, 화는 물론 금석학의 대가로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중국의 완적(阮籍), 옹방강 등 당대 최고의 석학과 교류를 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추사의 고택 예산은 고택 뒤 암벽에 각인된 여러 글씨와 현판 등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은 71세 때 쓴 봉은사의 ‘판전(版殿)’으로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부원군의 자손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했지만 많은 옥고를 치룬다. 그 결과 제주로 유배를 간 것이다. 제주의 추사 유배지는 최근에 알려지고 있다.
추사의 글씨는 유배 전후가 확연히 다르다. 같은 글씨를 비교해 보면 일반인도 쉽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제주에 설립된 추사유배지 박물관에 가서 전시되어 있는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확실하게 그 차이를 알 수가 있다.
귀양 가는 길에 들른 해남 대둔사에 써준 무량수각(無量壽閣: 1840)은 대단히 획이 기름지고 두텁고 자신감이 넘치며 윤기가 흐르는 반면, 귀양 후 예산 화엄사의 무량수각(1846)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을 드러내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좌절 속에서 핀 독자적인 글씨체가 태어난 것이다. 치졸해 보이는 단순미를 보여 준다. 바로 추사체의 탄생인 것이다.
추사체는 정신적으로는 귀양이라는 역경 속에서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70 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든(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의 결정판이었다.
9년간의 유배생활은 비참했다. 곤장을 맞은 장독으로 고생하면서, 삭막한 곳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곳에서 그저 글을 쓰고 수선화를 키우는 것이 일과였다.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문에 빛이 밝으니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라고 쓴 글씨는 당시 자신의 처지를 잘 나타낸 글이다.
유배된 집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진 대경향교에서 후학을 가르친 곳 ‘의문당(疑問堂)’의 현판은 추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원래 자리에는 복제품이 걸려 있다. 추사가 유배 생활에 그린 ‘세한도’(歲寒圖: 1840)와 제자 이 상적과의 사연도 눈 여겨 볼만하다.
역관(譯官)인 이상적이 북경을 왕래하면서 수많은 책을 추사에게 보내 주었고 세한도에 완적의 화제도 받아 왔다. 그가 보낸 책들의 물량을 모으면 수레로 한 차가 넘었다고 한다. 요즈음에도 그 많은 책을 보내주기 어려운데 교통도 불편한 제주로 그 시대에 귀한 중국의 서적을 그렇게 많이 보냈다는 것은 이상적이 추사를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엿 볼 수 있다. 추사 역시 그에 감동해 세한도를 그려 준 것이다.
5월은 각종 행사가 많은 달로 가계의 지출이 만만치 않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있고, 대부분의 학술 세미나가 집중되어 있는 달이다. 제주행 비행기에 예전에는 비즈니스맨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올레 길 탐방객이 더 많아졌다. 등산화에 등산복 차림, 배낭을 맨 승객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저 단순히 단체로 우르르 떼 지어 몰려다니는 관광이 아니라 가까운 친지들과 주제를 가지고 가는 테마 여행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한 테마 여행 중 하나로 추사 유배지 탐방 여행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제주목 다음으로 제주 서남쪽 대정현이 큰 고을이었고, 6.25 전후만 해도 제주에서 사람이 많았던 곳이 모슬포였다. 그처럼 왕성했던 제주의 서남쪽이 낙후된 것은 제주 순환도로가 비껴갔기 때문이다. 최근 올레 길이 개통되고 관광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서서히 각광을 받고 있다.
제주 서남쪽 모슬포 옆에 자리 잡은 사계리를 거점으로 추사 유배지에 세운 추사 박물관과 귀양살이 하던 옛 집, 대정 향교, 그리고 잠수함 관광과 올레 길 10번 또는 관광도로 자전거 하이킹, 가까운 산방산굴 방문도 의미가 있다. 일정 사이에 형제섬을 바라보면서 ‘SEA & BLUE’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제주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제주 몬순’이나 ‘제주카노’를 맛보는 여유를 가지며 저녁에는 제주 해산물 식사 후 세계 3대 탄산 온천인 산방탄산온천에서 피로를 풀면 몸과 마음이 모두 알차고 뜻 있는 테마 여행이 될 것이다.
추사 박물관의 모습이 마치 세한도의 집을 형상화한 것 같으며, 입구 계단은 귀양 3천리를
채우기 위해 구비구비 돌아온 곡행(曲行)을 상징해 비스듬히 돌을 깔았다고 한다.
반드시 박물관에 들러 도록(圖錄) ‘해국에 먹물은 깊고(서귀포시-2011)’ 한 권을 사거나, 아니면 세한도 영인본 하나 정도는 사서 두고두고 음미할 가치가 있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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