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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9 13:54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윤기 공생복지재단 회장, 인간애로 ‘깡통인생’을 채우다
윤기 공생복지재단 회장, 인간애로 ‘깡통인생’을 채우다
  • 이경원 기자
  • 승인 2019.12.02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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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국경을 넘어 어려운 이웃 등대지기 51년

 

국내 현존하는 아동시설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은 전라남도 목포 유달산 기슭에 자리한 공생원(共生園)이다. 이 곳은 올해로 무려 91년의 역사를 갖는다. 일제 강점기 때 만 들어졌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곳은 한국 사회복지 의 뿌리나 다름없다. 윤기 회장은 올해로 51년째 부모님의 유 업을 이어 공생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부모님이 이끌어 온 날들을 훌쩍 넘어선 한국 사회복지분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세간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자신이 해 온 일을 굳이 나서서 알리지 않은 까닭 이다.  지난 11월 13일 윤학자공생재단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서 윤기 회장을 만났다. 윤 회장은 “공생원은 가 장 어려운 사람들과 한 세기를 같이 해왔다”며 “사회사업은 그 시대,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회장은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창자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 고아의 날’을 제정하는 것이 6·25전쟁으로 한 때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받았던 한국이 해야 할 과제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인류 사회 내일의 희망인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지도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민간대사로서 한일 가교 역할에도 힘쓰고 있다. 재일동 포를 위한 양로원 ‘고향의 집’을 세우고, 한일 합작 영화 <사랑 의 묵시록>을 제작하는 등 한일 복지 문화 교류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일본과의 관계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요즘 국가를 넘은 공생원의 인간애는 두 나라 지도자들에게 더불어 사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공생원으로 시작된 공생복지 재단은 한국에 현존하는 아동 시설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공생원이 꿈을 갖고 자립하자는 뜻에서 1977년 한국 최초로 공생복지재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생복지재단은 2014년 목포지역의 시설을 묶어 공생원, 공생재활원, 목포장애인요양원, 무안자 립원, 예손자립원, 신흥어린이집, 전라남도가정위탁지원 센터를 품고 있다. 윤 회장은 현재 한국의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윤학자공생재단’ 회장과 ‘고향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일본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공생원의 역사는 윤기 회장의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됐다.

1928년 윤 회장의 아버지 윤치호는 일명 ‘거지대장’ 전도사였다. 그가 19세에 목포항에서 선교사와 노방전도를 하면서 다리 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고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면서 공생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조선총독부 관리로 부임한 외할아버지를 따라 목포 공생원에서 음악을 가르친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였다. 공생원에서 음악과 일본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던 윤학자는 공생원 원장이었던 윤치호와 결혼했다. 이후 남편 윤치호와 함께 공생원을 운영하면서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윤학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고초 를 당하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을 베풀었던 고아들의 도움으로 봉변을 면하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져 목포에도 인민군들이 몰려들자 다른 이들이 피난을 권했지만 고아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공생원에 그대로 남았다. 그 다음해 식량 지원을 요청하러 간 남편 윤치호가 행방불명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홀로 공생원을 지키며 고아 구제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남편을 대신해 공생원 원 장으로 부임한 윤학자는 한국에서 40여년 간 3000명의 고아를 키우며 ‘한국 고아의 대모’가 됐다.

-공생원이 올해로 91년의 역사를 맞았다.

“사회사업은 그 시대,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공생원은 가장 어려운 사람들과 한 세기를 같이 해왔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갖는다. 1920년대 공생원은 고아, 부랑인, 한센시병 환자 등 그 사회에 가장 약했던 사람들을 돌봐주는 종합복지시설이었다. 지금은 장애인 복지시설, 아동복지 시설 등이 구분돼 있지만, 당시에는 어려운 사람이 다 모여서 사는 게 공생원이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때는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공생 국민학교 사업을 시작했고, 1940년대에는 해방이 되면서 해외에 있던 동포들이 돌아와 귀환동포 구호사업을 했다. 1950년대에는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목포가 고아들의 집합소가 됐다. 당시 목포 공생원에 500명이 넘는 고아들이 생겨났다. 1960 년대 전쟁미망인 자녀를 위해 한국 최초로 무료탁아소를 개설한 것도 공생원이었다. 1970년대가 되니까 고아들이 자라서 성인이 됐다. 사회에 나가 자립할 때가 되니 기술이 필요해서 서울에 소년소녀직업훈련원을 만들었다. 공생원 출신 아이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자립심을 길러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에는 명칭을 서울종 합직업훈련원으로 바꿔 직업훈련 사업을 서울시 위탁으로 38년간 해왔다. 1980년대엔 유엔에서 세계 ‘장애인의 해’를 정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장애인 복지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공생재활원이라는 재활원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일본으로 넘어가 실향민 혹은 재일동포를 위한 양로원 사업을 했다. 2000년대부터는 자원봉사자와 복지헬퍼 양성 사업을 해 오면서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현재는 2020년 유엔에서 ‘세계 고아의 날’을 제정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고 있다.”

-공생원 설립자 아버지 윤치호는 ‘거지대장’으로 불렸다.

“아버지는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동냥을 마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쌀만 구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일본인 장로한테 찾아가 고아들에게 웃음이 없으니까 음악을 가르쳐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게 음악 선생님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해서 공생원에 온 음악교사가 어머니였다. 공생원의 역사는 아버지가 만든 역사지만 아버지가 쌀만 구걸했다면 오늘날처럼 이어지지는 못했 을 것 같다. 웃음을 잃어버린 고아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고 싶다는 아버지의 감성이 어머니 윤학자를 감동시켰고, 훗날 윤학자로 하여금 공생원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머니 윤학자(다우치 치즈코)는 ‘한국 고아의 어머니’라고 불리며 한국과 일본인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6·25 때 고아들의 식량을 구하러 간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됐는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매일같이 기다렸다. 어머니는 사회사업에 뜻이 있으셨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 옆에 있어주면 된다고 결혼을 했는데,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니 아버지가 해 오셨던 것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돌보신 것이다. 어머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분이었다. 겸손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셨다. 해방 후 일본 여성인 어머 니의 안위가 위험했을 때, 아이들이 ‘일본사람이지만 우 리 어머니’라며 보호했다. 그 이후부터 어머니는 당신의 생명은 아이들이 지켜준 것이라며 죽을 때까지 고아들을 위해 살겠다고 하셨다. 오랜 기간 어머니의 진심을 봐 온 목포 시민들이 어머니를 존경했고, 모두가 ‘어머니’라고 불렀다. 목포 시민의 상 제 1호 대상자가 일본인 어머니였고, 정부에서는 최초로 일본과 한국이 1963년 국교 정상 화가 되기 이전에 일본 여성에게 문화훈장 국민장을 줬다. 이에 대해 일본 열도도 놀랐다. 1967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목포시에서 최초로 시민장을 해줬다. 장례식장에는 목포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한 시민 3만명이 참석했을 만큼 지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그날 목포는 울었다’고 보도했다. 그때 나는 장례식석상에서 외할머니가 했던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결혼이란 나라 와 나라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한다. 하늘 나라에서는 한국인, 일본인도 없는 모두 형제자매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말씀하신 그 믿음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런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

-회장님에게 목포는 어떤 곳인가.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꿈과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곳이 며 일본 여성이었던 어머니를 최초의 시민장으로 명복을 빌어준 곳이다. 목포라는 말만 들어도 따스함과 고마움 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목포는 나에게 국적보다 인간이 우선한다는 시민정신을 심어주었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시절, 불모지였던 한반도에 나눔과 헌신을 실천했던 윤치호·윤학자의 유업은 윤기 회장으로 이어졌다. 1942년 목포에서 윤치호와 윤학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윤 회장은 26세가 되던 해, 어머 니 윤학자가 돌아가시면서 갑작스럽게 공생원 원장을 맡게 됐다. 그런 그가 부모님의 유업을 이어 50년 간 공생원을 이끌어 온 데는 수많은 은사들의 힘이 컸다. 가나야마 마사히데 전 주한 일본대사, 마츠오 시즈마 전 일본항공 회장 등이 공생원 운영에 도움을 줬으며, 한국의 아동문 학가 윤석중, 방송작가 한운사 등이 정신적 지주로서 버팀목이 돼 줬다. 윤기 회장은 사회복지사업을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오롯이 나를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 가능했다”고 말한다. 윤 회장은 1982년 40세 때 일본으로 가서 재일 한국인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에 나섰다. 그것이 지금의 ‘고향의 집’이다. 1989년 사카이를 시작으로 오사카, 고베, 교토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고향의 집’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공생원을 이어받은 26살 윤기 청년의 마음은 어땠나.

“사실상 내가 사회사업을 공부한 것은 공생원 후계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전쟁으로 폐망한 덴마크가 농촌부흥으로 나라를 일으킨 이야기를 담은 유달영의 <덴마크의 부흥사> <유토피아 원시림> <새 역 사를 위하여>, 심훈의 <상록수> 등의 책을 읽고 농촌생 활의 꿈을 꾸었다. 농촌을 풍요롭게 해야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공생원을 맡게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장남인데다 사회사업을 공부했으니 공생원 원장이 되길 바랐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어떻게 아이들을 돌봐줘야 할지도 모르는 자격 없고 준비 안 된 후계자였다.”

-운영하는데 고비가 많았을 것 같다.

“원장을 맡았을 당시 공생원 아이들이 320명쯤 됐다. 보육교사 20명이 한 사람당 평균 15명의 원생들을 맡았다. 반면 정부에서 공생원에 지급한 것은 식량 외에 부식비가 1인당 30원, 외국원조 1인당 5달러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원장 책임이었다. 젊은 원장은 정부에서 지급해 주는 것 외에는 조달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어딘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 어머니는 돈을 빌려가면서 고아들을 키워왔기 때문에 빚쟁이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보통 심정으로 공생원을 운영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려운 시기는 계속해서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아사히신문 오카이 기자가 나를 가나야마 마사히데 대사에게 소개해 준 것을 시작으로 지원군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토 총리로부터 어머니 윤 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가나야마 대사는 어 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 다 나에게 도움이 돼 줬다. 대사를 통해 일본항공 회장과도 알게 됐다. 일본항공 마츠오 시즈마 사장과의 인연을 계기로 아동숙사 기증을 받게 됐다. 그 때 도움을 받아 목포 유달산 아래 지금의 ‘사랑의 집’ 하우스 20채를 짓게 됐다. 이후 아이들이 어머니 나라에 가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일본항공 마츠오 회장의 도움을 얻어 일본에도 갈 수 있었다. 사회복지사업은 얼마나 마음의 문을 크게 여는 지가 중요한데 그때 용기를 내 그분들께 도움을 요청 하지 않았더라면 공생원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윤석중·한운사 선생과의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새싹회를 만들어 어린이 운동을 해 오신 윤석중 선생님과 인간에게 행복을 선물하려고 드라마를 쓰시는 한운 사 선생님을 만난 것은 천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분들은 내가 부모님의 뒤를 이어 사회사업을 해 오는데 정신적인 버팀목이 돼 주셨다. 윤석중 선생님은 아동문학가로,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초등학교 졸업식 노래를 비롯해 2000 여곡을 작사하신 분이다. 윤 선생님은 내가 모르던 어머니에 대해 알게 해줬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나를 고아 들과 함께 키웠다. 나만을 사랑해 주지 않던 어머니를 원망도 했다. 윤석중 선생님은 내게 어머니의 수기가 실린 일본 여성잡지 <주부의 벗>(1961년 4월호)을 보내줬다. 그 수기에는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직장도 없이 공생원을 나가는 내 아들과 딸들의 장래 문제입니다. 그들에게 직장을 갖게 하는 것이 현재 저의 가장 큰 꿈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자기 자식도 키운 경험이 없는 나는 ‘젊은 내가 원장을 왜 내가 해야 되나’하며 공생원에서 도망갈 생 각만 하고 있었는데, 윤석중 선생님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한 것이다. 그 때 큰 용기를 얻고 어머니의 꿈을 실현 시키는 마음으로 서울에 소년·소녀들의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다. 윤석중 선생님은 훈련원 원가도 만들어 주셨다. 한운사 선생님은 방송 시나리오 작가셨다. 한 선생님은 내게 ‘아버님께선 드문 분이셨다. 그때 대학생들은 휴머니즘에 빠지고 공산주의에 심취했었지. 너의 아버지가 그것을 실천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야’라며 아버지를 영웅시했다. 한 선생님은 ‘고향의 집’ 설립을 사카이·오사카·고베·교토까지 도와주셨고, 도쿄 땅이 확정됐을 때 병상에 계시던 중에도 마지막 기력을 다해 벌떡 일어나셨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던 것이 너무 감사하다. 부모님의 사랑의 유업을 이어받았다고 하나 두 선생님의 말씀은 내 가슴을 설레게 했고, 이 유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돼 주셨다.”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나.

“어머니가 일본인이었지만 내가 일본 여인과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공생원 아이들이 ‘가고 픈 나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을 키워준 어머니 나라인 일본에 가보고싶다고 했다. 당시 국내 사정으로는 해외여행은 꿈나라에 가는 것만큼 힘들었다. 그런데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기적적으로 대한항공과 일본항공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가게 됐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오사카 박애사라는 아동복지 시설과 공생원이 자매결연을 맺은 적이 있어 그곳에 갔는데, 아내(후미에)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소곳하고 여 성스러운 모습이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었다. 원생의 말에 도전을 받아 일본에 가서 결혼을 하게 됐다.”

-‘고향의 집’은 왜 짓게 됐나.

“서울에 공생원 출신 아이들을 위한 직업훈련원을 짓고 나니까 내 마음속에 일본에 가서 아시아의 고아들을 도 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1982년에 공생복지재단 동경사무소를 만들어서 일본에 갔다. 당시 재일동포들이 고독사로 13일 만에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고독사가 일본의 고령사회 문제점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 때 내 머릿속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우메보시(메밀 장아 찌)가 먹고싶다’고 한 장면과 재일동포의 고독사 보도가 오버랩 됐다. 7세 때 한국에 오셔서 50년간 김치를 드시며 사셨던 어머니가 병상에서는 우메보시가 먹고 싶다고 하셨던 것을 떠올리니 ‘그간 한국에서 고생하셨겠구나’ 싶었다. 재일동포들은 ‘김치가 먹고 싶다’고 할 것 같았다. 그 일을 계기로 어머니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재일동포의 고독사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재일동포들이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양로원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생애를 통해 내가 직접 느껴서 할 수 있는 나만의 축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향의 집’은 어떤 곳인가.

“고향의 집은 재일한국인 고령자를 위한 노인 홈이다. 고 향의 집은 1989년 사카이를 시작으로 오사카·고베·교토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세워졌다. 올해 11월 고향의 집은 개설 30주년을 맞았다. 일본인을 비 롯한 재일 한국인 고령자 분들이 고향에 있다는 생각으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노인 종합복지문화센터를 목표로 한다. 다만 고향의 집에는 일반 노인 홈과 달리 한국인 직원이 있고, 한국 노래와 한국 음식도 있다는데 큰 차이가 있다. 식사에 우메보시도 나오지만 김치도 나온다. 고향의 집에서 휠체어 타고 있는 할머니가 아리랑이 흘러나오니 춤을 추려고 했다. 복지는 문화라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일본 전국 10개소에 고향의 집 건설을 꿈꾸고 있다. 고향의 집은 고령사회를 맞아 노인 홈의 기본 사명인 봉사와 인간 존중에 앞장서며 사회공헌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윤기 회장은 공생원, 직업훈련원, 고향의 집 등 복지시설 운영과 더불어 한일 복지문화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1995년 차범석 총 프로듀서 와 김수용 감독, 길용우 주연으로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제작했다. 어머니를 소재로 목포 사람들의 인정과 시민정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자연을 소개하는 영화다. 1992년부터는 사회복지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매년 ‘한일 마음의 교류 심포지움’도 개최하는 등 민간대사로서 한일가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 다. 최근에는 ‘UN 세계 고아의 날’ 제정 청원 운동에 앞 장서 공생원 창립정신에 깃들어 있는 공생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윤 회장은 “왜 사회사업을 하느냐”는 질문에 어려운 사람을 돕기 보다는 “좋아서 한다”고 답한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나 자만”이라며 “나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어려운 사람이란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았고, 누구나 어려운 형편에 처할 수 있다는 게 윤기 회장의 생각이다.

-‘UN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은 어떤 의미를 갖나.

“유엔 ‘에이즈 고아’ 통계에 의하면 세계 고아 수는 약 1억 5000만명, 양부모가 없는 고아는 약 1500만명으로 추 산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풍요로워졌지만, 고아를 과거의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아원이란 명칭을 사용 안 해 고아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고아원의 명칭은 없어지고 아동복지시설로 변경된 것이다.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은 한국의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6·25전쟁으로 한국은 한 때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 까지 받기도 했다. 어린이 가운데 가장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고아를 돕는 것은 한국이 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인류 사회 희망인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지위가 향상되고, 세계인으로부터 존경 받는 나라, 정신적 지도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촌에 유일한 분단국가 한국이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으로 유엔에 ‘세계 고아의 날’ 을 제안하는 것은 북한 고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 한 일이 된다. 이런 흐름에서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추진은 첫째, 고아를 더 만들지 말자는 전쟁 예방 평화 운동 이다. 둘째, 전 세계 사람들이 고아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인권 옹호 운동 이다. 셋째, 전 세계 사람들이 고아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생명존중 운동이다. 모든 어린이는 인간의 자식이다. 그들은 지구상에 살 권리가 있다. 고아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유엔에서 ‘고아의 날’이 제정이 되기 위해선 어떤 과제가 남 았나. “지난해 뉴욕서 열린 청원대회에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기울였고, 유엔 인권선언 정신에 입각해 ‘고아의 날’은 제정 돼야 한다는 것에 많은 공감을 했다. 한반도의 최남단 항구도시 목포항에서 자란 공생원과 재활원 아이들이 뉴욕에서 합창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주목했다. 유엔이 정하는 기념일은 민간단체가 아니라 유엔 회원국이 청원을 해야 하고, 회원국 과반수가 찬성해야 제정이 된다. 이제 정부가 나서서 정식으로 유엔에 제안해 줘야 한다. 내년 9월 총회에서 가결 또는 제안이 되도록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요즘 한일 관계가 갈등이 깊어지며 안타까운 상황에 있다.

“부모님이 세우신 유달산 기슭 공생원에는 오부치 총리가 심은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이희호 여사님은 교토의 ‘고향의 집’에 무궁화 꽃을 심어주고 한국에서 복지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견학을 오고 있다. ‘고향의 집’은 단순한 복지시설이 아니라 한일 간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생원에 가면 ‘인간애로 국가를 넘은 공생원’이라고 쓰여 있다. 이낙연 총리가 전라남도 지사를 할 때 방문해 쓴 글귀다. 한국과 일본이 인간애로 국가를 넘은 공생원이라는 정신에 입각해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온 인생을 공생원과 함께 하셨다.

“공생원에서 재미있었던 추억이 많다. 그중에서도 아이들과 축구 하던 일, 동지나해로 저무는 태양을 보면서 노래 하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함께 노래할 때 평화가 있었다. 우정과 선의와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배운 것은 꿈을 갖는 것이었다.”

최근 <깡통인생-빈 그릇을 채우리라>란 책을 출간했다. 깡 통인생, 무슨 뜻인가.

“나는 깡통으로 왔다가 깡통으로 가려는 생각이 있다. 아버지가 그랬듯 욕심 없이 비어있는 모습으로 산다는 뜻에서 깡통이라고 표현했다. 내 마음에 욕심이 없고 비어있으면 그만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위해 채울 수 있는 게 많아지는 것 같다.”

-‘깡통인생’에서 사회사업가는 무슨 꿈을 꾸는지가 중요하다 고 하셨다.

“사회사업가는 자신보다 이용자들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고 출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윤치호 전도사가 학교 선생을 찾아가 빵이 아닌 고아들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 주고 싶다고 한 것이 공생원의 역사가 됐다. 전 세계 고아들 얼굴에 웃음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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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회장은?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회장

-사회복지법인 윤학자공생재단 회장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창자

<주요수상이력> 

1978. 2  제22회소파상(목포 공생원)

1979. 6  대한민국 국민포장

1996. 8  일본 후생대신 감사장

2000. 5  일본 오사카 지사 표창장

2006. 6  삼성호암재단 제16회 호암상(사회봉사상)

2007. 10  대한민국정부 국민훈장동백장

2009. 7  일본 외무대신 표창장

2009. 10  목포명예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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