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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3-29 17:05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뼛속까지 스며든 더위, 이럴 땐 냉면이 그립다
뼛속까지 스며든 더위, 이럴 땐 냉면이 그립다
  • 이만훈 언론인
  • 승인 2018.07.31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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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요리문화가 합작해 변주해낸 걸작 ‘국수의 탄생’

 

참, 더워도 너무 덥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있어도 정수리부터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이 소리만 안 난다뿐이지 아예 도랑을 짊어진 기분이다. 솔바람 보내주던 숲마저 축 늘어진 채 가쁘게 할딱이고, 기온이 사람의 체온보다 높다보니 부채질을 해도 도무지 헛일이다. 옛 사람들이 “염소 뿔도 녹인다”고 한 말이 뻥튀기만은 아닐 듯싶다.

당대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폭염에 지치는 게 마치 술에 취하는 것 같다(溽暑醉如酒)고 했다. 중서(中暑)는 더위를 먹는다는 뜻인데 더위도 더위 나름이지 요즘 더위는 술로 치면 족히 50도는 될 테다. 한껏 취해 온 몸이 나른한 게 매가리가 하나도 없다. 무더위를 나타내는 ‘서(暑)’자가 ‘무엇을 삶는 것처럼 더운 것(熱如煮物也)’을 뜻한다는 한나라 때 사전(釋名)의 풀이가 그렇게 와 닿을 수 없다. 작달비라도 한 판 세게 뿌렸으면 좋으련만….

일 년 중 가장 더울 때가 삼복(三伏)즈음이다. 하지 때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이 초복이요, 입추(立秋)지나 첫 경일이 말복이니 그 안에 ‘작은 더위(小暑)’ ‘큰 더위(大暑)’가 다 들어 있음에랴.

하지(夏至)를 지나고 나날이 해가 짧아지고 있음에도 그동안 달궈진 땅덩어리가 품었던 열기를 내뿜는 탓이다. 망백(望百)을 훌쩍 넘긴 노모는 절기는 못 속인다고 말씀하시지만 절기(節氣)란 게 그런 변화에 맞춰 정한 것이니 엎어 치나 메치나 한 가지다.

아무리 물세례를 받아도 잠시뿐 아예 몸이 익는 것 같다. 바깥 열기가 뱃속까지 침노해 불덩이가 이글대는 탓이다. 불을 끄려니 나도 모르게 찬물만 들이킨다.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아 이내 짜증이 된다. 입맛은 천길만길 뚝 떨어졌지만 그나마 꾸물거리려면 뭐라도 먹어야 한다. 맞다, 냉면이다!

냉면집에 가려면 더위의 포위망을 뚫고 가야 하는 패러독스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어이하랴, 뼛속까지 스며든 더위를 쫓아내려면 뼛속까지 냉기를 침투시켜야 하는 데 냉면만한 게 없으니. 시절이 좋아 에어컨이 빵빵하게 터지는 면옥(麵屋)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손바닥이 쩍 달라붙는 놋그릇에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 한 가운데 또아리를 틀고 앉은 면발을 보는 순간 이미 모든 게 끝이다. 방금까지도 정신마저 혼미할 정도로 온 몸을 고문하던 더위란 놈은 저만치 삼십육계 줄행랑이요 머릿속조차 투명한 얼음처럼 산뜻 명징해지고야 만다. 우선 국물부터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식초며 겨자는 치거나 말거나 조자룡 칼 쓰듯 젓가락을 조화부리며 사리를 말아 올리듯 건져 입 안 가득 빨아대면 채 씹기도 전에 목구멍을 이리 치고 저리 치며 시원스레 간질간질 넘어가는 그 맛이라니…. 냉면은 축복이다!

냉면은 인류의 지혜 모인 찬란한 문명

냉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인류의 여러 지혜가 모아져서 이룩한 찬란한 문명이다. 그 출발은 국수다. 문자 그대로 냉면이 ‘찬 국수’이니 말 같지 않다고 타박할지 모르지만 그 또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사연과 역사를 품고 있다.

국수는 분식(粉食)이다. 곡물 가루를 반죽해 실오리 같이 뽑아 삶아 먹는 요리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분식에 유용한 곡물이 있어야 하고, 이어 가루를 내는 기술에다 국수발을 만드는 요령과 도구가 필수적이다. 요즘이야 뭐 그까짓 게 대수냐며 콧방귀를 뀌겠지만 그 건 정답을 알고 시험을 보는 자가 장원을 했다고 으스대는 꼴이다. 아주 먼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한테는 어느 하나 쉬이 터득한 게 없었다. 오랜 세월 갖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국수, 나아가 냉면으로 우뚝 서기까지 지난한 여정이 필요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온 주곡은 쌀과 밀, 보리다. 세 가지 모두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1만5000년 전부터 재배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중 국수는 밀이 있어 가능했고, 밀로부터 시작됐다. 밀에는 다량의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들어있어 쌀, 보리와는 달리 끈기가 있기 때문인데 옛 조상 중 어느 분께서 고맙게도 그 비밀을 간파하신 덕분이다.

중국 신장고고학연구소에는 지금부터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국수가 보관돼 있다. 신장 투르판의 화염산(火焰山·서유기에 나오는 그 산이다)유적에서 발굴된 이 국수는 밀을 갈돌로 빻아 만든 것이다. 가루가 곱지 않았기 때문에 밀가루를 반죽해 조금씩 떼어낸 뒤 양손바닥으로 비벼 면발을 만들었다. 이는 오늘날 신장 사람들이 먹는 국수와 같은 방식이다. 라그만(laghman)이라는 국수다.

신장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재배밀은 4000년 전의 것이고, 화염산과 하미(哈密)에서도 3000년 전의 재배밀이 발견됐다. 이곳 밀은 카스피해 남쪽, 즉 지금의 이란 쿠제스탄에서 온 것이다. 이곳은 7000년 전 인류가 최초로 밀을 경작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신장지역에 밀을 가져온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초원이나 시베리아에서 온 원시 유럽인종이었다.

당시 중원에서는 밀을 거의 재배하지 않았다. 남방에선 주로 벼를 심었고, 북방에선 조 등을 심었다. 밀은 중앙아시아에서 신장을 거쳐 포도, 석류 같은 것들과 함께 한나라나 전국시대에 중원에 전해졌다. 보리와 밀이 문자로 구별된 때가 한대에 들어와서이므로 설령 밀을 길렀다하더라도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소규모 재배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수의 탄생은 동·서 요리문화가 합작해 변주해낸 기막힌 걸작이다. 서역의 밀가루 음식이 중국의 오랜 탕(湯)·찜 요리문화와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형된 것이 바로 국수이기 때문이다. 밀가루 음식을 탕으로 맛있게 먹으려면 간이 잘 밸 수 있도록 얇게 늘려야 한다. 덩어리째 넣으면 간이 잘 배지 않는다. 게다가 가늘고 긴 면의 형태로 만들어야 양도 늘어난다. 이렇듯 탕 문화는 국수의 탄생과 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서양의 빵 문화에서 보듯이 원래 밀은 가루를 내어 구어 먹는 식재료였는데 중원의 탕 문화를 만나 끓는 물에 조리하기 적합한 디자인으로 변모한 음식으로 재탄생한 것이 국수인 것이다.

국수는 송나라 때 보편화 된 음식

중국에서 문헌상 국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400년 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가사협(賈思勰)이 쓴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나오는 ‘수인병(水引餠)’이다. 이 책에는 수인병을 만드는 ‘수인박돈법(水引餺飩法)’까지 나온다. 수인병은 ‘물에서 잡아 늘린 밀가루 음식’이란 뜻이다.

한나라 사람들이 먹는 밀가루 ‘병(餠)’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탕병(湯餠)’과 ‘증병(蒸餠)’이었다. 탕병은 물에 삶은 작은 면 조각 또는 면 덩어리를 가리킨다.

당나라 때 밀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제분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서 밀가루 값이 하락해 귀족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분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국수처럼 밀반죽을 끓는 물에 데치거나 삶은 형태로 먹는 음식을 ‘탕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국수는 탕병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았다.

‘면(麵)’이라는 글자가 ‘병(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오로지 ‘국수’만을 가리키는 말로 된 것은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다. 국수를 탕병이라 부르지 않고 요즘처럼 ‘짜장면’ ‘쫄면’ ‘냉면’하는 식으로 국수요리 이름 뒤에 ‘면(麵)’을 붙여 불렀다. 북송 수도 카이펑(開封)의 청명절 모습을 그린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에는 당시의 번화상이 잘 담겨있는데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가게를 열어 24시간 장사를 했다. 이는 남송시대 맹원로(孟元老)가 쓴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는 북송의 다양한 모습이 자세히 기록돼 있는데 특히 음식문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카이펑 사랑들이 먹었던 다양한 국수를 이름과 함께 소개하고 있어 국수가 송대에 보편화되고 인기 있는 음식이었음을 알 게 해준다. 이 책에는 또 “옛날에는 그저 숟가락을 쓰고 지금은 모두 젓가락을 사용한다”고 돼 있어 면요리가 대중화됐음을 간접으로 증언하고 있다. 당시 카이펑의 인구는 150만 명(동시대 유럽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은 40만, 런던은 10만)으로 상공업 종사자가 압도적인 까닭에 외식문화가 발달했는데, 간단히 요기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국수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벌써 음식 배달문화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송대에 국수는 패션음식이자 패스트푸드였다.

우리나라에 국수가 등장한 것은 고려 때로 국수문화가 한창이던 송나라로부터 수입됐을 개연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우리 문헌에서는 국수를 찾아볼 수 없는데다 송나라 사람으로 인종 1년(1123년) 사신을 따라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10여 종류의 음식 중 국수 맛이 으뜸(食味十餘品而麵食爲先)”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제례에 면을 쓰고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국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출생 후 3일째 되는 날에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손님(湯餠客)들이 국수(湯餠)를 먹던 풍속이 나오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최영(崔瑩)이 손님을 대접할 때마다 국수와 반찬을 준비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 때 메밀국수 조리법과 국수틀 전해져

뭐니 뭐니 해도 국수의 전형(典型)은 밀가루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냉면은 밀가루가 아닌 메밀가루가 주(主) 재료다. 메밀은 밀가루처럼 글루텐성분이 없어 반죽도 어렵거니와 국수로 만들기는 더 더욱 어렵다. 여기서 궁즉통(窮卽通)의 놀라운 지혜가 동원된다.

중국 북부는 밀 재배지역이지만 밀을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밀 대신 메밀, 귀리 등을 심었다. 메밀과 귀리는 밀보다 가뭄에 강해 물이 부족한 곳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밀과 귀리는 밀보다 끈기가 없어 국수를 만들려면 밀과는 다른 방식을 써야했다. 이른바 ‘압출식(壓出式)’이다. 이는 ‘제민요술’에 나오는 ‘분병(紛餠·당면)’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분병은 곡물의 전분을 풀어 자루에 넣고, 그 자루에 작은 구멍을 뚫어 끓는 물 위로 짜서 떨어뜨리면 마치 케이크에 데커레이션(decoration)을 할 때의 크림줄기와 닮은 면발이 생긴다. 바로 ‘압출면(壓出麵)’이다. 자루 대신 나무에 홈을 파고 그 구멍에 맞도록 깎은 숫공이를 이용해 지렛대 원리로 눌러 국수를 뽑는 장치가 곧 ‘국수틀’인데 산간 마을의 필수품이 되면서 메밀국수시대가 열리게 됐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때 송나라로부터 선승(禪僧)들을 통해 메밀국수 조리법과 국수틀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절이 대부분 산악지대에 위치해 메밀 생산지와 가까운데다 수행을 위한 공양으로 국수만한 게 없어 송대에 사찰음식으로 메밀국수가 각광을 받았던 사실에 비춰보면 절간마다 국수틀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예로부터 스님들이 국수를 하도 좋아해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을 짓는다 해서 국수를 ‘승소(僧笑)’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국수틀이 기록상으론 조선시대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쓴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면착기(麵榨機)란 이름으로 처음 나온다. 지금도 강원도 정선 등 산간지역에는 국수틀로 메밀국수를 뽑아 먹는다.

냉면은 메밀국수와 김치문화가 결합해 만들어진 절묘한 조합의 요리다.

냉면은 본래 겨울음식이었다. 메밀은 수확이 늦가을에 이뤄져 겨울이 제철인 셈인데다 육수로 김장으로 담근 동치미나 백김치의 국물을 썼으니 이래저래 겨울이 돼야 먹을 수 있었다.

여기에다 평양 등 북쪽지방은 겨울철 추위가 매서운 까닭에 불을 많이 때다 보니 초저녁 참에는 방바닥이 뜨끈뜨끈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여서 이를 식히기 위한 그 무언가가 필요했을 테니. 가뜩이나 겨울철 농한기라 할 일도 없이 심심한 터에 밤은 긴데 잠자기는 이르고, “에라, 국수나 말아라!”가 절로 나오니 무슨 핑계로든 차가움을 먹는 겨울 별미였던 것이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도 냉면 즐겨

겨울냉면의 정조(情調)는 1929년 12월 1일 발행된 ‘별건곤’ 24호에 실린 ‘사시명물(四時名物) 평양냉면’이란 제목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평양 사람이 타향에 가 있을 때 문득문득 평양을 그립게 하는 한 힘이 있으니, 이것은 겨울에 냉면 맛이다. 함박눈이 더벅더벅 내릴 때(중략) ‘국수요?’하는 큰 목소리와 같이 방문을 열고 들여놓는 것은 타래타래 지은 냉면이다. 꽁꽁 얼은 김치죽을 두르고 살얼음이 뜬 진장 김칫국에다 한 저(箸) 두 저(箸) 풀어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겨울에 냉면을 먹는 풍속은 이미 조선후기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겨울에 냉면을 먹는 모습을 두고 “관서 땅 시월이면 눈이 한 자 넘게 쌓이리니/겹겹 휘장 부드러운 담요에 손님을 잡아두고는/갓 모양 뜨거운 쟁개비에 노루고기 구워서는/ 길게 뽑은 냉면에 퍼런 배추절임 먹겠지(西關十月雪盈尺/複帳軟氍留款客/笠樣溫銚鹿臠紅/ 拉條冷麪菘菹碧)”라고 시를 읊었다.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음력 11월편에도 냉면에 대해 나온다.

“메밀국수에 무절임과 배추절임, 그리고 돼지고기를 넣은 음식을 냉면이라고 부른다. 또 잡채와 배, 밤, 채 썬 쇠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참기름과 간장을 모두 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骨董麪)이라고 부른다. 관서의 면이 가장 맛있다.”

요즘으로 치면 동짓달이 되면 평안도와 황해도 북부 지역 사람들이 ‘물냉’과 ‘비냉’을 시절음식으로 즐겨먹었다는 얘기다.

유득공(柳得恭)이 평양의 풍속을 노래한 ‘서경잡절(西京雜絶)’에서 “냉면 때문에 돼지 수육 값이 막 올랐다네(冷麪蒸豚價始騰)”라 한걸 보면 18세기에 서도(西道)에서 냉면이 대단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도 냉면을 유난히 즐겼다. 고종을 모셨던 한말 상궁들의 증언에 의하면 고종은 평소 맵거나 짠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술도 거의 하지 못해 식혜나 사이다, 커피를 주로 들었다. 뜨거운 여름엔 칼국수, 잔치국수, 삼계탕, 추어탕 찌개를, 추운 겨울엔 냉면과 아이스크림을 주로 들었다. 고종이 먹던 냉면은 그릇에 면을 담고 열십자(十) 모양으로 편육을 얹은 다음 빈 곳은 숟가락으로 배를 저며 채우고, 편육 끄트머리에 잣을 뿌린 뒤 동치미 국물을 부어 만들었다고 한다. 고종이 먹기 위한 냉면을 위해 동치미를 따로 담갔는데, 배를 많이 넣어 무척 달고 시원했다고 한다.

앞서 본『동국세시기』의 기록에다 “국수를 나박김치나 동치미 물에 말고 위에 고기, 배, 배추통김치를 얹고 고춧가루, 잣을 놓는다”고 한 ‘규곤시의방(閨閫是議方’의 기록, “국수를 동치미물에 말고 무, 배, 유자를 얇게 저며 놓고 돼지고기 썬 것과 달걀 지짐을 썬 것, 후추, 잣을 놓는다”고 한 ‘부인필지(婦人必知)’의 기록들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냉면을 매우 다채롭게 만들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에도 차게 먹는 국수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한겨울에도 이를 딱딱 부딪쳐가며 먹는 냉면 같은 ‘찬 국수’는 없으리.

평양냉면, 1920년대 경성 요정에 진출

냉면 중 평양냉면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 경성의 요정에 진출하면서, 한반도의 남부에 평양냉면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메밀을 주로 사용하는 평양냉면과 당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메밀순면인 ‘소바(そば)’ 문화가 결합되면서 평양냉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이와 함께 평양냉면의 조리법이 표준화되면서 경성 이외 지역에서도 평양냉면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여기에다 냉면은 설렁탕과 함께 배달까지 됐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하리오. 경성방송국(JODK) 초창기 라디오 연속극 생방송 때 음향효과를 내기 위해 한일관에서 냉면을 배달시켜 직접 먹으며 연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냉면 배달은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황윤석(黃胤錫)의‘이재일기(頤齋日記)’에는 1768년 과거시험을 보는 도중에 냉면을 시켜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가하면 임금인 순조도 냉면을 시켜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고종 때 문신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따르면 순조가 열한 살 무렵인 즉위 초(1800년) 달구경을 하다가 시장기를 느낀 나머지 신하에게 냉면을 포장해오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이때 한 신하가 자기가 먹을 요량으로 1인분의 돼지고기를 별도로 시켰다가 이를 안 어린 왕이 삐친 나머지 그 신하한테는 냉면을 주지 않았다는 에피소드인데 이를 통해 냉면의 배달 사실과 더불어 당시까지만 해도 냉면이 수랏간 메뉴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서민음식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대개는 상층문화가 아래로 흐르는 법인데 냉면은 이 같이 아래에서 위로 전파된 특이한 케이스인 것이다.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는 업자 지규식(池圭植)이 남긴 ‘하재일기(荷齋日記, 1891년)’에는 여름용 옷감인 항라 1필에 30냥, 냉면 한 그릇에 1냥으로 적혀 있다. 냉면의 인기가 날로 거세져 1924년 ‘개벽’에는 한 그릇에 15전 하는 냉면으로 하루 300원의 매상을 올린 가게가 생겨났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다. 하루에 2000그릇을 판 셈이다. 당시 쌀 한 되에 35전, 맥주가 35전 했고 인천의 짜장면이 10전 했다. 매상 중 상당 부분이 배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코 적지 않은 값을 주고 냉면을 사먹을 수 있는 건 대부분 양반들이기 때문이다. 점잖은 체면에 직접 가지 않고도 냉면전문 배달부인 ‘중머리’를 통해 언제 어디서건 냉면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1926년 1월 6일 자 동아일보에는 평양의 냉면 배달부 16명이 파업한 기사가 실렸는데 일급 60전을 1원으로 올려달라는 요구였다. 1935년에 평양의 냉면 한 그릇의 값은 25전이 됐고 배달비로는 10전 정도가 주어졌다. 배달은 새벽 두 시까지 이어졌는데 세숫대야만큼 커다란 그릇을 한 번에 여러 개씩 날라야 했다. 중머리들은 자전거를 타고 묘기를 부리듯 배달을 다녔다. 한 번에 81그릇을 배달한 ‘중머리의 전설’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냉면은 순조 사건(?) 이후 정식으로 궁중음식에 편입돼 왕실연회에도 등장하게 된다. 순조비의 육순잔치가 열린 헌종 14년(1848년)의 ‘진연의궤(進宴儀軌)’와 경복궁 재건 축하연이 열린 고종 10년(1873년)의 ‘진작의궤(進爵儀軌)’에는 레시피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순조비의 육순잔치에는 메밀국수를 동치미국물에 말고 양지머리 편육과 돼지사태 편육, 배추김치, 배, 꿀, 잣 등을 넣었다. 매우 달달했을 것 같은 구성이다. 고종 때는 메밀사리를 대한문 밖 국수집에서 공수했고 재료에 고춧가루가 추가됐으며, 꿀을 빼고 양도 줄었다. 고기를 구하기가 쉬운 왕실에서도 육수로 동치미국물을 쓴 게 인상적이다.

 

근대적 제빙기술 등장으로 냉면문화 변화

겨울철 별식이었던 냉면이 요즘처럼 여름음식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부터. 한여름에도 얼음 조달을 쉽게 할 수 있는 근대적인 제빙(製氷)기술과 겨울에 캐낸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는 냉장시설이 등장하면서 가능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예조(禮曹)에 속한 빙부(氷夫)들이 겨울에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에 보관해두고 주로 왕실용으로 썼다. 얼음은 3월 초하루부터 9월 상강(霜降)까지 모든 제향(祭享) 때 출고돼 쓰였다. 왕과 왕비를 위해선 3~9월 얼음이 제공되지만 종친과 2품 이상 관리들한테는 6월에만 주었다. 이 같은 제도는 1894년 7월부터 시작된 갑오개혁으로 폐지됐다.

우리나라에 제빙소가 처음 등장한 건 1909년 부산항 근처에 공장을 세운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이듬해 4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수산회사에 넘어갔고, 이 회사는 이어 제물포와 원산, 군산 등지에도 공장을 열었다. 신선한 생선의 유통을 위해 얼음포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값이 만만치 않았던 탓에 재래식 채빙과 장빙이 더 선호됐다. 공장을 돌리기 위한 전기가 충분치 않았던 것도 한 몫 했다. 따라서 실제로 제빙공장에서도 얼음을 직접 만들어내기보다는 겨울에 캐서 보관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1913년 4월 용산의 제 1철로 근처에 들어선 일본인 소유의 제빙공장도 그런 식이었다. 이 공장은 경부선 기차 안에 시원한 음료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 운영됐음에도 그랬다. 뒤를 이어 경성에 설립된 ‘경성천연빙회사(京城天然氷會社)’와 ‘조선천연빙회사(朝鮮天然氷會社)’도 마찬가지였다. 한강에서 채빙은 주로 이들 두 회사가 맡아 했는데 그 양은 해마다 2만~4만 톤가량이었다. 1920년대에 채빙가(採氷價)는 톤 당 1원20전~1원30전으로 여름 판매가는 관(貫·3.75kg)당 7, 8전이었으니 16갑절 이상 남는 장사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소위 제빙회사란 게 늘어났고, 이에 따라 1910년대 중반 이후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경성거리에 ‘빙수점(氷水店)’이란 간판을 내건 가게나 포장마차들이 등장하곤 했다. 당초 천연얼음은 음식용과 잡용으로 나뉘어 음식용은 빙수나 청량음료, 냉면에 사용되고, 잡용은 주로 병원에서 환자치료용으로 쓰이거나 수산물 유통에 사용됐다. 하지만 갈수록 여름에 얼음 수요가 급증하면서 잡용을 음식용으로 쓰는 일이 툭하면 일어나곤 했다. 오죽했으면 1921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얼음 관리에 관한 법률까지 발포할 정도였다.

냉면업계의 구세주 화학조미료 ‘아지노모도’

어쨌거나 한여름에도 얼음을 확보할 수 있게 되자 경성과 평양에서는 바야흐로 여름냉면이 등장하게 되고, 삽시간에 대단한 인기메뉴로 자리 잡게 됐다. 하지만 냉면을 위해서는 얼음에다 육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육수로 쓰는 동치미나 백김치, 나박김치는 주로 겨울에 마련했는데 이제는 여름에도 이들 육수용 김치를 담가야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필요한 채소나 양념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육수용 김치를 담그는 게 만만찮은 일이었다.

이때 냉면업계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화학조미료인 ‘아지노모도(味の素)’였다. 1908년 일본인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1864~1936)가 화학적인 방법으로 만든 ‘글루탐산’인 아지노모도는 1915년경부터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해 1920년대 말에는 이미 이 땅 전역에서 대박을 치며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특히 ‘냉면+아지노모도=미미(美味), 모든 음식+아지노모도=미미, 음식점+아지노모도=천객만래(千客萬來)’라는 신문광고 카피(동아일보, 1931년12월17일자)에서 보듯이 김칫국 대신 냉면육수용으로 팔리면서 냉면의 ‘사계절화(化)’ 및 냉면집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0년대 평양 대동문(大同門) 앞에 2층으로 된 냉면집이 처음 들어선 이래 평양 시내 곳곳에 수십 곳의 냉면집이 문을 열었다. 이 같은 유행으로 1920년대엔 ‘평양면옥상조합(平壤麵屋商組合)’이 생겨날 정도였다. 원래 평양 사람들은 동치미를 담글 때 익힌 쇠고기나 돼지고기 덩어리를 넣어 냉면 육수를 마련했는데 이로 인해 냉면 육수에는 동물성 단백질의 아미노산 맛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그 맛을 아지노모도의 글루탐산이 대신하게 됐으니 냉면집 주인의 입장에선 아주 편리해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지노모도가 매우 비싼 편인데도 이내 정통 육수를 대신해 냉면집을 접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맛을 보는 손님 입장에서도 심심한 동치미 육수보다 훨씬 자극적인 맛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오늘날 우리가 한여름은 물론 사시장철 냉면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결국 한강·대동강의 얼음과 아지노모도 덕분인 것이다.

요즘 냉면값이 크게 오르며 외식물가를 선도한다고 해서 ‘누들플레이션(noodlefulation)’이란 말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웬만해서 한 그릇에 1만 원이 넘고 이름 난 집에서는 1만8000원짜리도 있다니 이미 서민음식은 아닌 셈이다. 아, 냉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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